[광화문에서/신치영]정치금융에 무너지는 금융산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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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치영 경제부 차장
신치영 경제부 차장
차기 우리은행장 인선이 이상한 모양새로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은 건 지난달 중순이었다. 지난달 12일 우리은행이 이사회를 열어 행장후보추천위원회를 사외이사 3명, 외부 전문가 3명,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 대표 1명 등 7명으로 구성했다고 밝힌 뒤 며칠 지나서였다. 금융계 소식에 밝은 한 지인이 차기 우리은행장으로 이광구 우리은행 부행장이 낙점될 것 같다고 귀띔했다.

서강대 경영학과를 나온 이 부행장을 위해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가 움직이고 있으며 서금회의 한 핵심 멤버가 금융계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현 정권의 ‘문고리 권력’을 우군으로 끌어들였다고 했다. 금융당국이 이순우 행장과 2명의 부행장을 ‘검증 대상’으로 청와대에 추천했는데 청와대가 리스트에 포함돼 있지 않은 이광구 부행장을 포함시키라고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고 전했다.

이때만 해도 ‘찌라시에 나오는 얘기이겠거니’ 생각했다. 워낙 이순우 행장의 연임 가능성에 강하게 무게가 실려 있던 터였다. 행장직 수행에 별다른 흠결이 없었고 우리은행 임직원들의 평판도 좋았다. 우리금융지주 자회사 매각과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 발 벗고 뛰어다닌 공로를 금융당국도 인정하고 있었다. 행추위가 후보 리스트를 간추리기도 전에 청와대가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검증작업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돼 보였다.

이렇게 말 안 되는 일들이 며칠 후부터 실제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시나리오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처럼. ‘이광구 부행장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이 행장과 이 부행장의 2파전’이라는 말이 돌다가 이내 이 부행장 내정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도 금융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 행장의 연임으로 결론 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금융당국에 이 행장의 연임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다수의 행추위원은 “우리은행 민영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 행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윗선’의 뜻은 이 모든 걸 뒤집을 만큼 확고했다.

결국 이 행장은 우리은행 지분매각 작업이 마무리된 지난 주말에 마음을 굳혔다. 1일 오후 임직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연임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날 밤 이 행장은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윗선이) 이 부행장을 찍어서 냈는데 안 되면 난리가 나지 않겠나. 내가 연임을 포기하지 않고 (차기 행장이) 된다면 조직이 난장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임 포기가 ‘자신이 조직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도 했다. 오죽했으면 포기할 생각을 했을까.

이 부행장이 이 행장보다 우리은행장 자리에 더 맞는 능력을 갖췄을 수 있다. 문제는 정당한 절차와 심사가 무시된 채 소수의 권력자가 입맛에 맞는 인사를 내려 보냈다는 점이다. 그간의 정황을 보면 대우증권 사장 선임, 은행연합회장 선출, 금융회사들의 감사 선임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금융권 인사들은 민간인이 정치권력의 줄을 타고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정치금융’이 이전의 ‘관치금융’을 대체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금융이 고착화되면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은 권력에 길들여지고 있다. 경영에 전념하기보다 정권과 금융당국의 뜻을 살피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는 데 집중하고 줄 대기에 시간을 쏟는다. 당국이 규제로 창의와 혁신을 옥죄건, 불합리한 요구를 하건 불만을 내비치지 않는다. 밉보였다가 언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금융산업 선진화를 통해 금융서비스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정치금융에 만신창이가 돼가는 금융회사들을 볼 때 허망한 꿈에 불과해 보인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우리은행#찌라시#서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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