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정종을 조상에게 올릴 수는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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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추석이 되면 조상에게 예를 갖춰 술을 올린다. 이때 쓰는 차례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청주(淸酒)다. 청주는 ‘맑은술’이라는 뜻으로 막걸리 같은 탁주(濁酒)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어떤 술이나 좋아한다는 뜻으로 쓰는 ‘청탁불문(淸濁不問)’의 청탁은 바로 청주와 탁주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청주를 정종(正宗)이라고 하는 사람이 꽤 많다. 정종은 국립국어원 웹사이트에 표제어로도 올라 있다. ‘일본식으로 빚어 만든 맑은술’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청주와 똑같다. 사전대로라면 청주와 정종은 동의어다.

납득하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국립국어원은 정종의 뜻풀이에 ‘일본 상품명’이라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정종은 술의 종류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특정 상품의 이름’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정종은 우연하게 탄생한 이름이다. 1717년 고베에서 창업한 한 양조장이 1840년 새 술을 빚어 놓고 이름을 고민했다. 당시 6대째인 주인장은 잘 아는 교토의 절을 찾아가 주지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주지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임제정종(臨濟正宗)이라는 경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종’이 ‘청주’와 ‘세이슈’로 발음이 같고 한자도 마음에 들어 새 술 이름을 정종으로 정했다. 이 술은 대박을 쳤다. 전국 각지에서 ‘○정종’ ‘△△정종’이라는 술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正宗’은 음으로 읽으면 ‘세이슈’지만 뜻으로 읽으면 ‘마사무네’가 된다. 시간이 흐르며 마사무네가 세이슈를 압도해 지금은 마사무네로 읽는다.

1883년 후쿠다라는 사람이 부산에 일본식 청주 공장을 세운 이후 조선에도 여러 종류의 일본 청주가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정종이 제일 잘 팔려 부지불식간에 ‘정종=일본 청주’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제품명인 라이방을 선글라스로, 바바리를 트렌치코트로, 봉고를 승합차로, 포클레인을 굴착기라는 뜻으로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청주는 정종이 아니다. 하물며 조상에게 올리는 술을 ‘정종’이라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광복 이후 일본말 순화 운동이 많은 성과를 거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술의 상품명인 정종을 표제어로 두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청주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차례주#청주#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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