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수]김 이병의 트라우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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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수 사회부 차장
김상수 사회부 차장
자대 배치를 위해 올라탄 열차 안에서 공군 김 이병은 착잡했다. 훈련소에서 그에게 부여된 주특기는 헌병. 헌병대는 군기가 세기로 소문난 곳이다. 동기들은 “니가 빽이 없어 재수 없게 헌병으로 차출됐다”고 했다.

자대 배치 후의 하루하루는 악몽 그 자체였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졌고 영문도 모른 채 거의 매일 매를 맞았다. 툭하면 ‘집합’이 걸렸다. 집합은 주로 선임하사가 퇴근한 뒤 늦은 저녁, 또는 새벽에 창고나 불 꺼진 식당, 초소 뒤에서 이뤄졌다. 병장→상병→일병→이병 순으로 차례차례 내려오는 집합이 끝나면 어느새 날이 밝아왔다. 만화같이 눈앞에서 ‘별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도 경험했다. 군홧발로 밟히고 귀싸대기를 하도 맞아 별을 본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축구를 하다 김 이병이 슛을 한 차례 날렸다. 전반이 끝나고 하프타임에 집합이 걸렸다. 선임병이 흥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이 개××야. 너 미쳤어. 이병 놈이 어디서 슛을 해. 그건 병장들이나 하는 거야. 한 번만 더 그러면 정말 죽는다.” 그 일이 있은 뒤 김 이병은 축구를 할 때 한 번도 슛을 하질 못했다.

공군은 육군보다 휴가를 자주 나가지만 김 이병에게 휴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자대 복귀가 죽기보다도 싫었다. 휴가에서 복귀하는 날이면 꼭 집합이 걸렸기 때문이다. 고참들은 “졸병들이 없으면 집합 걸 맛이 안 난다”며 후임병들이 휴가 다녀오는 날을 ‘D데이’로 골랐다. 김 이병은 휴가 복귀일이었던 어느 추운 겨울날, 꽁꽁 언 땅에 ‘원산폭격’을 한 뒤 10m 정도를 머리로 밀고 가야 했다.

근무가 끝난 뒤 내무반 생활은 더 힘들었다. 이병들은 내무반에서 항상 출입문 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고참들 수발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참이 담배를 물면 잽싸게 달려가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잘 때는 고참들 이불도 이병들이 깔았다. 고참들 군화 닦기, 군복 다림질도 졸병들 몫이었다. 내무반 안에서는 제대로 웃을 수도 없었고 인상을 써도 안 됐다. 고참들에게 졸병들은 갖고 노는 ‘장난감’이자 마음껏 부려먹는 ‘마당쇠’였다.

김 이병이 집합과 구타에서 간신히 해방된 것은 병장이 되고 나서였다. 졸병 때 당한 일 때문에 그는 후임병들에게 잘 대해줬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후임병들이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자신보다는 구타와 폭언을 일삼는 고참들의 말을 더 잘 들었기 때문이었다.

33개월 반의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한 뒤에도 김 이병은 한동안 ‘군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렸다. “군대를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기는 소리 한다’고 생각했다.

김 이병은 지금은 중년의 직장인이 됐다.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잊혀졌던 군 트라우마는 28사단 윤 일병 사망 사고를 계기로 다시 깨어났다. 영화 필름 돌아가듯 예전의 악몽이 떠올랐다. 김 이병이 군에 있던 시기는 1990∼1992년이다. 그는 전역한 지 22년이 지난 지금도 구타와 가혹행위가 여전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그는 휴대전화 사용, 내무반 폐쇄회로(CC)TV 설치, 신고자 포상제가 악습의 고리를 끊는 비법이 될 수 없음을 안다. 구타와 가혹행위는 오랜 기간 이어져온 ‘관행’이다.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부대를 이끄는 리더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뼈를 깎는 지휘관의 개혁 의지와 지속적인 관심, 혹독한 처벌만이 해답이라고 본다. 그동안 군 간부들은 ‘밑에서 알아서 군기 잡기’에 맛들여 구타와 가혹행위를 눈감아 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들이 감은 눈을 떴으면 하는 게 김 이병의 바람이다. 김 이병은 바로 필자다.

김상수 사회부 차장 ssoo@donga.com
#군대#내무반#가혹행위#군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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