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영계백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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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내일은 초복(初伏)이다. 초복 중복 말복(삼복·三伏) 가운데 첫 번째 복날이다. 보통 열흘 간격으로 온다. 심한 더위를 일컬어 ‘삼복더위’라 하니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됐다는 뜻이다. 한자 복(伏)은 ‘사람 인(人)+개 견(犬)’ 형태로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엎드릴 복, 굴복할 복’으로 새긴다. 여름의 더운 기운이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굴복시켰다는 뜻이다.

복날, 한적한 계곡이나 냇가로 나가 개를 잡아 개장국을 끓여 먹는 풍속을 ‘복달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복달임으로 첫째 민어탕, 둘째 도미탕, 셋째 개장국을 쳤다. 민어나 도미는 구하기 힘들고 비싸니 개장국은 서민의 음식이다. 개고기에 여러 가지 양념과 채소를 넣고 끓인 국이 개장국이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개장국이 허약한 몸에 영양을 보충해 준다고 했다. 보신탕(補身湯)이라는 뜻이다. 개고기를 혐오하는 분위기 때문에 요즘은 복날 대표 음식에서 삼계탕에 많이 밀려나 있다. 그래서일까. 언중이 더러 쓰는 ‘사철탕’ ‘영양탕’은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장어가 개장국과 삼계탕을 대신한다.

영계백숙(-鷄白熟). 삼계탕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어린 닭을 통째로 삶아 만든다. 그런데 이 음식 이름의 뜻을 정확히 아는 이가 드물다. ‘영계=young+계(鷄)’로 아는 이도 있다. 나이가 어린 남성이나 여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영계’가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영계의 ‘영’은 ‘young’과는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다. 한자말 ‘연계(軟鷄)’가 변한 것이다. 한자 그대로 ‘연한 닭, 무른 닭’이다. 아직 덜 자라 뼈가 단단하지 않다는 뜻이다. 병아리보다 조금 큰 약병아리가 영계다.

‘반가워’가 ‘방가워’로 소리 나는 것처럼 ‘ㄴ’은 ‘ㄱ’ 앞에서 ‘o’으로 소리 난다(자음동화). 이런 현상에 따라 ‘연계’가 ‘영계’로 발음됐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며 마치 그것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영계’로 굳어진 것이다. 국립국어원 웹사전도 ‘연계’를 ‘영계’의 원말로 밝히고 있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순우리말처럼 보이지만 한자어에서 온 게 많다.

서양에서도 가장 더운 때를 ‘dog days’라고 한다. 개장국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큰개자리의 시리우스(dog star)가 태양과 함께 뜨고 지는 7, 8월이 가장 덥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나, 뭐라나.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삼복더위#영계백숙#자음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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