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아버지의 도시락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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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 1980년대 중반 이런 제목의 기업 광고가 꽁보리밥 도시락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렸다. 누구나 먹고살기 팍팍하던 시절 선생님은 어김없이 도시락을 두 개 가져와 하나를 학생 몫으로 건네주었다. 때때로 선생님은 “속이 불편하다”며 두 개 모두 학생들에게 주는 일이 잦았다. 허기진 제자들을 생각해 빈속을 찬물로 채운 스승의 깊은 뜻을 세월 지나서야 깨달았다는 글귀는 많은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세대마다 도시락에 얽힌 기억도 달라진다. 날마다 도시락을 싸오는 것만으로 출신 계층이 드러난 시절도 있고, 점심시간마다 잡곡을 얼마나 섞었는지 혼식 검사를 받은 세대도 있다. 하굣길에는 빈 도시락 안에서 수저가 딸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갔다. 젊은 세대는 밥과 계란프라이, 김치, 고추장을 양은도시락에 몽땅 넣고 흔들어 먹는 것을 문화적 코드로 즐긴다.

▷최근 일본에선 ‘461개 도시락은 아버지와 아들, 남자의 약속’이란 수필집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아내와 이혼한 40대 가수 아빠는 외동아들의 고교 입학식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년간 꼬박꼬박 아들의 도시락을 쌌다. 부엌일에 서툰 중년 남성이 도시락을 통해 애틋한 부정(父情)을 전했던 스토리를 읽고 “요리책을 읽고 눈물이 난 것은 처음”이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반찬을 만들며 아들을 생각했고 아들은 도시락을 먹으며 아버지를 떠올렸을 터다. 아버지는 461개 도시락을 통해 461가지 추억을 선사했다.

▷매일 도시락을 싸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학창 시절 ‘엄마표 도시락’을 먹을 때 느꼈던 온기는 지금도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도시락은 자식을 향한 사랑 그 자체였다. 학교 급식이 보편화하면서 집집마다 다른 멸치볶음과 무말랭이를 품평하는 재미도 사라졌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눈물겨운 기적인지를 깨닫는 요즘이다. 오늘은 어버이날, 소박한 도시락을 마련해 부모님과 정겨운 추억이 쏟아지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도시락#부모님#461개 도시락은 아버지와 아들#남자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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