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안철수와 새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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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정치부장
정연욱 정치부장
서울 마포구 근처를 지나가다 한 건물에 걸린 대형 걸개그림에 눈길이 멈췄다. 지역구 민주당 의원이 기초의원 예비후보자와 함께 웃는 모습이었다. 예비후보의 기호는 없었고, 그 자리에 ‘물음표(?)’ 표시가 적혀 있었다. 기호 2번을 걸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속내가 묻어났다.

26일 출범한 새정치민주연합이 내건 통합의 대의명분은 ‘기초선거 무(無)공천’이었다. 기초단체장이나 기초의원 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않겠다는 것이다. 안철수는 2일 통합 선언에서 “이것이야말로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실제로 국민에게 보여준 것”이라고 역설했다. 통합 발표문에선 “새정치는 약속의 실천”이라고 못 박았다. 이 약속을 어긴 여권을 겨냥해 ‘약속 이행 대 거짓말’ 세력의 한판승부로 몰아가려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철수의 선택은 맥을 제대로 짚지 못했다. 먼저 ‘약속’ 프레임이다.

안철수는 스스로를 새정치의 아이콘으로 규정하면서 ‘여권=약속 파기 세력’으로 차별화하자는 복안이다. 하지만 안철수가 그동안 한 약속도 많았다. 국민들은 안철수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양당의 기득권을 깨기 위해 독자 세력화의 길을 걷겠다고 한 약속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약속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약속을 고리로 걸었다. 국민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과거 자신의 약속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넘어가는 대신 상대방의 약속 파기는 따끔하게 지적해 달라는 뜻인가? 약속도 ‘좋은 약속’과 ‘나쁜 약속’으로 구분 짓겠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난 대선 때 약속은 기초선거 정당공천을 폐지하자는 것이었다. 본질은 공천제도 개선이었다. 정당 공천을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의 룰은 그동안 여야 합의로 바꿔 왔다. 한쪽이 약속을 어겼다 해서 비판받을 순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가 엄연히 살아 있는데 나머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이 약속 이행이라는 주장은 궁색해 보인다. 야권 일각에선 “본질을 회피하는 자해적 대응 방식”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특정 정파가 대통령선거를 폐지하는 대신 내각제 개헌을 공약했다고 생각해 보자. 국회에서 치열한 협상이 무산되면서 내각제 개헌이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대통령후보를 내지 않는 길이 맞나. 안철수는 이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기초선거 무공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당공천의 폐해를 꼽는다. 공천권을 따내기 위해 거액의 공천 헌금이 오가는 음습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더 나가면 조만간 공천 장사의 주범인 정당을 해체하자는 주장도 등장할 것이다. 지나친 비약은 금물이다. 정당이 아무리 애물단지가 됐다고 해도 우리 헌법에 명시된 정당 민주주의는 함부로 내팽개칠 것은 아니다. 어렵더라도 정당을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더 쇄신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안철수는 창당대회 인사말에서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내에서 일고 있는 ‘기초선거 무공천’ 철회 요구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기초선거 무공천의 정치적 득실을 따질 필요는 없다. 다만 정당의 가치, 정치의 본령을 외면해서는 안철수의 새정치도 모래 위 누각일 뿐이다. 안철수가 ‘호랑이 굴’을 외치며 통합한 것도 정당의 울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야권은 정당 폐업과 신장개업의 드라마를 펼쳐 왔다. 그때마다 구호만 바뀌었을 뿐 정치개혁과 새정치의 슬로건이 펄럭였다. 안철수가 손만 내밀면 새정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안철수의 새정치는 시험대에 올랐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
#새정치민주연합#안철수#정당 공천#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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