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싱가포르의 칠리 크랩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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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식도락이다. 낯선 곳에서 접하는 색다른 음식은 재료와 요리법, 맛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먹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나라마다 관광객 입맛을 사로잡는 국가대표급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식문화가 크게 다른 나라에선 식재료 자체가 생소한 경우도 있지만 때론 우리에게 익숙한 먹을거리인데도 조리법에 따라 전혀 새로운 맛을 경험할 수 있다. 미식(美食)의 세계에 빠지면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음식 중 빠지지 않는 게 칠리 크랩이다. 조리 방식은 요리사에 따라 다르지만 프라이팬에 잘게 썬 야채와 함께 튀긴 머드 크랩(Mud Crab)에 매콤달콤하고 걸쭉한 소스를 끼얹어 볶음밥이나 번(bun)이라는 작은 빵과 함께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쫀득쫀득한 게살의 풍미도 뛰어나지만 특히 칠리(Chillies·고추의 일종)가 주재료인 따뜻한 소스의 맛이 환상적이어서 손가락까지 쪽쪽 빨면서 요리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칠리 크랩으로 유명한 ‘점보’ ‘노 사인보드(No Signboard)’ 등의 현지 레스토랑들은 여러 곳에 분점이 있지만 손님이 워낙 많아 예약을 하지 않으면 한참 줄을 서야 한다. 지난해 가 본 레스토랑 3곳에선 알래스카 크랩은 1kg에 100싱가포르달러, 스리랑카 크랩은 60싱가포르달러를 받았다. 당연히 모두 수입산(産)이다. 칠리는 열대 아메리카가 원산지로 멕시코와 카리브 해, 미국 남서부, 중국 쓰촨 등에서 애용하는 향신료다. 결국 싱가포르 칠리 크랩은 다른 나라의 식재료를 싱가포르 스타일로 조리해 히트한 음식이다.

▷2009년 9월 말레이시아 관광장관은 “칠리 크랩은 원래 말레이시아 요리”라며 “싱가포르가 우리 음식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칠리 크랩 조리법을 부엌에서 처음 고안했다는 싱가포르의 여성 요리사는 “내가 원조”라고 반박했다. 논란이야 어떻든 남의 것을 가져다 자기 것으로 상품화하는 싱가포르의 아이디어가 인상적이다. 창조경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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