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독(毒)을 차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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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마저 가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디!’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디!’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 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미디어 아티스트 이상현 씨의 ’역사의 어느 날’
미디어 아티스트 이상현 씨의 ’역사의 어느 날’
1919년 3월 1일. 서울 휘문의숙에 다니던 16세 소년은 3·1 선언문을 품에 숨기고 고향인 전남 강진에 내려온다.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려다 일경에 체포되는 바람에 6개월 동안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같은 선후배 틈에서 문학을 논하던 소년은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건너갔다. 간토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귀국한 그는 1930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한때 친구의 누이동생인 무용가 최승희와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 낭만파 청년. 일제강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고 광복 이후 고향에서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6·25전쟁 때 서울에 숨어 있다 수복 하루 전날 포탄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그의 이름은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처럼 우리말의 운율과 섬세함을 지켜낸 서정시의 높은 봉우리이자 불의에 항거한 민족시인이다. 1939년 발표한 ‘독(毒)을 차고’는 식민지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하기보다 죽음으로 맞서겠다는 결연함을 다짐한 저항시였다. ‘이리 승냥이’의 역사를 죄다 부인하는 일본의 후안무치한 행실을 보면서 미디어 아티스트 이상현 씨의 작품이 생각났다. 일제강점기 흑백 사진을 합성해 과거와 현재를 포개 놓은 ‘낙화의 눈물’ 연작은 흘러간 어제를 통해 오늘을 돌아보게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 편에서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 문화를 무시한다”고 썼다. 국제 사회에서 공생의 자세를 회복하는 열쇠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언급한 한일 쌍둥이론이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웃이 밉다고 지긋지긋하다고 훌쩍 이사를 갈 수도 없는 상황. 원인 제공이야 늘 일본이 하지만 두 나라의 꼬인 관계는 우리에게도 하등 이로울 게 없다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독(毒)을 차고#김영랑#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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