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광작]북한범죄 기록보관소도 만들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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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작 성균관대 명예교수
박광작 성균관대 명예교수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사회민주당)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유대인 집단거주지의 나치범죄 경계 기념비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의 묵념을 올렸다. 진정한 용기와 올바른 과거사 청산의 전범(典範)이었다.

많은 사람은 브란트가 동방정책의 아버지이며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화해 협력을 이끌어 낸 ‘데탕트’의 주역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독 국가범죄를 기록하는 ‘중앙기록보존소’(잘츠기터 소재)의 창설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1961년 8월 13일 동독 공산당 제1서기장 울브리히트는 동독 국경수비대를 동원해 기습적으로 동서베를린 경계선을 봉쇄하고 장벽과 철조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이산가족이 되는 운명을 맞았다. 분노한 수십만 명의 주민은 서베를린 시청 앞 쇤네베르크 광장에 구름처럼 몰려왔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는 시청 발코니에 나와 운집한 시민들에게 “소련은 쇠사슬에 매인 그들의 개, 울브리히트의 목줄을 풀어 놓았습니다. 천인공노할 이 만행에 대해 항의만으로 끝낼 수 없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이어 그는 동독정권이 자행한 모든 국가범죄를 수집하고 보존할 중앙기록보존소의 설치를 공개 제안했다. 그해 11월 24일 니더작센 주의 잘츠기터에 동독범죄기록보존소가 설치됐고 독일 통일 후인 2007년까지 운영됐다.

브란트는 나치 범죄를 추적하기 위한 ‘나치범죄정보센터’와 마찬가지로 공산 전체주의 체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대응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나치정권의 박해를 피해 망명생활을 했으며 1953년 동베를린 민주봉기가 소련 탱크에 무참히 짓밟히는 과정을 체험한 인물이다. 따라서 인권이야말로 사회민주당의 진정한 진보 가치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계기로 동독정권으로부터 정치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근거자료로서 약 4만1000건의 이 범죄기록이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통일 직전에는 동독 과도정부 검찰의 자료 요청이 쇄도했다. 이 기록보존소는 민주화 기록의 ‘보고(寶庫)’가 됐다.

장성택 처형 후 북한 김정은 유일독재체제는 불안정한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 통치와 인권 말살을 무자비하게 자행하고 있다. 매뉴얼에 따라 탈북 월경자를 대수롭지 않게 살상하고 정치범강제수용소는 나치정권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북한의 인권 말살에 대한 감시는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모든 민주시민의 책무다. 그러나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기이하게 북한인권법은 국회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인권법을 연장하며 올해 회계연도 세출법안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등의 항목에 예산을 배정했다.

브란트가 추구했던 진보와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중도 좌파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왜 없는가. 남녘땅에서는 억압, 굶주림, 비탄에 빠진 북한 주민의 영혼을 잊지 않고 있으며 고난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는 희망과 위로를 보내야 한다. 북한인권법의 제정과 기록보존소의 설치가 시급하다.

박광작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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