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자작 납치극까지 벌어진 공포의 신년사 학습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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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평양시모란봉 구역개선영화관 앞에서시민들이 약속이나 한듯 쌍쌍이 신문을 꺼내읽는다.북한 매체는새해가되면신년사학습분위기를만들기위한각종연출사진들을만들어낸다.사진출처노동신문
추운 겨울 평양시모란봉 구역개선영화관 앞에서시민들이 약속이나 한듯 쌍쌍이 신문을 꺼내읽는다.북한 매체는새해가되면신년사학습분위기를만들기위한각종연출사진들을만들어낸다.사진출처노동신문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지난해 1월 이맘때 김일성종합대에선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화학부의 한 학생 어머니가 “아들이 괴한들에게 납치됐다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대학에 전화를 건 것이다. 학생이 보안원(경찰)들에게 진술한 납치 과정은 더 끔찍했다.

인민대학습당에서 공부하고 나왔는데 길옆 승합차에서 한 남자가 내려 “너 누구 동생이지” 하더니 다짜고짜 차에 태웠다는 것. 주먹으로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었는데 깨어 보니 농장 밭이었고, 칼질을 당한 손목에선 피가 철철 났다고 한다.

김일성광장 뒤편에 있는 인민대학습당은 평양의 중심부에 있다. 이런 곳에서 납치가 벌어졌다는 자체가 믿기 힘들었지만 학생의 아버지가 중앙당 조직지도부 당생활지도과 보안성 담당 과장이고 과거 보안원 출신이라는 점에서 보복 납치일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가뜩이나 최근 평양에선 법 기관 간부들에 대한 보복 살해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던 터다.

하지만 며칠 뒤 반전이 일어났다. 학생이 “사실은 문답식 학습이 너무 싫어 스스로 손목을 그어 자작극을 꾸몄고 어머니도 동조했다”고 자백한 것이다. 북한에서 이는 당장 반동으로 몰려 온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는 중대 범죄이다. 하지만 아버지 ‘끗발’이 하늘을 찌르는 직위이다 보니 해당 학생은 ‘49호 병원’(북한 정신병동을 지칭)에 보내지는 것으로 끝났다. 아마 그 정도 권력이면 지금쯤 그는 병원에서 퇴원했을 것이다.

김일성대 문답식 학습은 북한에서도 악명이 자자하다. 주제는 혁명역사, 노작, 신년사 등이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각 학부는 3일 동안 토너먼트를 벌여 최종 우승 학부를 가린다. 대진표대로 두 개 학부씩 강당에 모여 제비뽑기로 10여 명의 답변자를 뽑아 경쟁을 한다. 뽑기를 하는 순간은 강당에는 살얼음판 같은 긴장이 깔린다. 번호와 이름이 발표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소리가 쏟아지고 지명된 학생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창백해진다. 답변할 문제도 뽑기로 정하는데, 대답을 잘했다 해도 끝이 아니다. 다시 상대 학부에서 무작위로 추첨된 학생들이 나와 그 문제에 대한 추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행히도 김일성대 시절 뽑혀 나간 적은 없지만 많은 웃지 못할 사례들을 기억한다. 한번은 한 학생이 “김정일이 대학 시절 어느 공사장에서 비를 맞으며 학생들과 함께 일했다”는 일화를 이야기하자 상대편 질문자로 나선 학생이 준비를 못했던지 한참 당황하다가 불쑥 “그날 정말 비가 오긴 왔습니까” 물었다. 강당에는 순간 폭소가 번졌다. 답변자도 당황했는지 “비가 온 것 같습니다” 대답했다. 당시에는 웃느라 별문제 없이 넘어갔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비가 오긴 왔었느냐”는 질문은 사실 등골이 오싹한 질문이었다. 김정일이 비를 맞으며 일했다는데, 감히 의문을 제기하다니….

우리 학부의 한 여학생도 대답을 잘못한 뒤 대동강에 나가 자살하겠다는 것을 친구들이 말려서 잡아온 일이 있다. 대답을 잘못해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찍힌다.

사정이 이러니 각 학부는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부터 학생들을 불러놓고 밤새 공부를 시킨다. 겨울방학은 한 달이지만, 지방 학생들은 고향까지 며칠씩 걸리는 기차를 타고 오가느라 일주일 넘게 보내고, 또 문답식 때문에 일주일 빨리 올라오느라 집에서 보름도 못 쉰다. 그 보름 동안도 문답식 답안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지난해부턴 김일성대의 문답식 경연 방식이 전국에 일반화됐다고 한다. 또 이전엔 신년사 내용만 외우게 했는데 지난해부턴 전국적으로 10여 일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신년사를 토 하나 틀리지 않게 외우게 했다. 이러니 누구라도 손목을 긋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 같다. 지난해 여름엔 개정된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10조 65개항도 모두 외우게 했다.

지금도 북한은 만사 제쳐놓고 신년사 외우기 ‘열공’ 중이다. 그런데 사실 북한의 매년 신년사는 “지난해도 다 잘했고, 올해도 다 잘해야 한다”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올해 서울의 한 70세 탈북자는 신년사를 몇 번 읽다가 “정은이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다니깐. 핵심이 없어요, 핵심이”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다. 방송 출연이 예정된 딸을 위해 반평생 신년사를 공부했던 내공을 살려 분석을 해주려 했는데 도무지 알맹이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천하제일 검객이라도 뜬구름이야 어찌 벨 수 있을까. 김정은 시대의 신년사는 김일성 시대보다 더 추상적이다. 자신 있게 내세울 분야가 없으니 이해는 되지만 젊은 지도자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분량도 1만 자가 넘는다. 참고로 올해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는 700여 자에 불과했다.

그나마 변화라면 올해는 신년사를 잘 외운 사람에겐 인센티브를 준다고 한다. 일반 주민에겐 비누나 치약 같은 상품을, 군인은 표창휴가를 주는 등 단위별로 재량껏 준다는 것이다. 사회주의가 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인센티브가 없어서이다. 남보다 조금만 더 하면 욕이나 처벌을 면하니 딱 그만큼만 한다. 채찍과 함께 당근을 꺼냈다니 나쁘진 않은 소식이지만, 하필이면 그 대상이 비생산적인 일의 극치인 신년사 외우기라니.

김정은은 자기가 25분간 읽어 내려간 신년사에서 얼마나 많은 주민들의 비극이 시작되는 줄 알고는 있을까. 내년엔 암기를 중단시키든지, 박근혜 대통령처럼 알맹이만 발표하면 어떨까. 숨차게 읽어 내려가지 않아 좋고, 주민들도 좋고 말이다. 신년사를 강제로 외우게 하고 스키장이나 만든다고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다. 민심을 얻는 방법은 먼 데 있지 않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인민대학습당#문답식 학습#김일성대#신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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