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부패한 公은 증세 말할 자격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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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직부터 의원 보좌관까지 접대, 낙하산, 예산낭비
부패는 진화를 거듭하고
“세금 늘려 복지 늘리자”는 건 公僕 배 불리기로 전락 우려
공공개혁 없이 창조경제 될까

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을(乙)은 자폭했다. 지난주 국정감사장에서 국회의원 보좌관들에게 로비했다고 폭로한 건설근로자공제회 정모 감사가 다음 날 사표를 냈다는 후문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다. (접대 대상은) 보좌관들이다.” 양심선언을 한 정 감사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경지에 올라서려면 보좌관 명단이 공개되고, 의원도 모자라 보좌관까지 갑(甲)질이냐는 개탄이 이어지고, 보좌관들의 자정(自淨) 선언과 함께 국회에선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 충돌 방지법)’ 대폭 강화 움직임이 나와야 했다. 그러나 정 감사가 전직 보좌관들 이름만 써내는 바람에 이번 일은 해프닝으로 그칠 공산이 커졌다.

‘보좌관 로비사건’은 공직자부터 정치권, 공공기관까지 전방위로 공(公)에 파고든 부패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전이됐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희비극이다.

건설근로자공제회는 이른바 막노동으로 애쓰며 살아가는 건설근로자 일당에서 4200원씩을 떼어 적립한 기금을 운용한다. 1년 252일 뼈 빠지게 일해야 100만8000원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경제민주화 입법 바람에 국회 권력이 막강해졌다더니, 보좌관까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서민층 등을 치는 반(反)민주적 슈퍼갑질이다.

이들은 벼룩의 간을 내먹었지만 공제회 사람들이 벼룩은 아니었다. 이진규 이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전 내려보낸 비서관 출신의 마지막 낙하산이고, 정 감사 역시 20년 보좌관 경력으로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다. 이사장 2억4800만 원, 감사 2억1800만 원, 그리고 관련 부처 퇴직 공무원을 포함한 임직원 평균 연봉 8044만 원이 전관예우용 신종 뇌물인 셈이다.

공제회가 본연의 임무라도 잘해 근로자 복지에 힘썼으면 또 모른다. 새누리당 이종훈 의원은 공제회의 ‘묻지 마 투자’로 2006년부터 810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다며 “감사원 감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예산 낭비를 시퍼렇게 감시해야 할 그 감사원조차 자체 예산에선 초록이 동색이라니 배신당한 기분이다. 작년 자산취득비 12억5000만 원 중 절반을 12월 한 달에, 그것도 섣달그믐날엔 서울 변두리 소형 아파트 전세금(1억7600만 원)을 물품 구입에 쓴 연말 낭비적 예산집행 사실이 국감에서 지적된 거다.

예산 낭비는 부패라고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에 명시돼 있다. 불요불급한 예산 집행뿐 아니라 로비, 불합리한 제도, 공직자의 무능도 예산 낭비 즉 부패라고 서울시립대 반부패시스템연구소 이정주 수석연구원은 논문에서 지적했다.

후진국 시절은 진작 벗어났고, 공무원연금을 포함한 평생 대우는 관(官)이 민(民)을 능가하는데도 부패가 심해진다는 건 통탄할 일이다. 세계은행의 거버넌스지수에서 ‘부패 통제’가 2007년 72.8에서 지난해 70.3으로 떨어졌다. 재정위기로 3차 구제금융이 절실한 그리스(51.2)보다는 낫지만 부패로 소문난 포르투갈(78.4) 스페인(81.8)보다 못하다. “증세로 복지하자”는 사람들이 모델로 삼는 덴마크(100), 스웨덴(99)과는 비교도 안 된다.

대통령의 복지공약을 위해 새누리당도 증세 기정사실화의 군불을 때고 있다. 그러나 부패한 정부, 국회는 증세를 말할 자격이 없다. 투명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만큼만 올라도 잠재성장률 4% 달성이 가능해진다. 부패는 외면한 채 증세만 외치는 건 공복(公僕) 아닌 공복(空腹)들 배만 불리자는 음모나 마찬가지다. 지난주 반부패 국제학술회의에선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에 증세가 쉽지 않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북유럽에서 세금 많이 내도 불만이 적은 이유는 부패가 없어서다. 공공부문이 커도 공직자는 검소하고, 예산 낭비 없이 복지 혜택으로 돌려준다. 스웨덴이 그리 좋다면 1990년대 재정건전성 회복을 위한 공공개혁부터 배우기 바란다. 나라가 부패할수록 재정적자와 공공부채가 늘고, 투자와 성장은 저해된다는 연구결과가 너무나 많다. 아무리 창조경제를 외쳐도 부패를 잡지 못하면 성장 아닌 창조적 부패만 만발할 판이다.

징글징글한 부패의 원인을 언제까지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유교문화,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같은 과거사에 핑계댈 순 없다. 현재 권력의 부패에 대한 태도가 국민의 교과서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싱가포르처럼 걸리면 사회에서 매장될 만큼의 엄벌은커녕, 개인적 착복만 없으면 괜찮다는 메시지를 날리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창조경제#복지#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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