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송덕수]읽기 어려운 암호문, 민법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송덕수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덕수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동서고금을 통해 고유한 말은 있으되 글이 없는 민족이 부지기수였고, 글이 있지만 변변치 않거나 읽고 쓰기가 너무 어려워 대부분이 글의 혜택을 볼 수 없는 민족 또한 무척 많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에게 한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축복이 모든 분야에 널리 스며들어 효과를 나타내고 있지는 못하다. 특히 법률 분야에서 그렇다.

수많은 법령 가운데 보통 사람의 생활과 가장 가까운 것은 민법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재산적, 가족적 생활 전부가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토씨와 극소수의 한글 용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자일뿐더러 띄어쓰기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민법만 보면 마치 우리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현재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검색되는 민법은 편의상 임시로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띄어쓰기를 해 놓은 것으로 정식 민법은 아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글자를 몰라 자신들의 권리를 찾지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런 한글 창제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민법을 알기 쉽게 새로 쓸 필요가 있다.

현행 민법에는 ‘溝渠(구거)‘ ‘堰(언)’과 같은 어려운 한자뿐만 아니라 ‘要役地(요역지)’ ‘承役地(승역지)’처럼 전문가도 알기 어려운 용어들이 태반이다. 거론한 용어들은 각각 ‘도랑’ ‘둑’ ‘편익을 받는 토지’ ‘편익을 위하여 제공되는 토지’ 등 알기 쉽게 바꿔야 한다.

우리 민법은 일제강점기 일본 민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제각(除却)하다(제거하다), 해태(懈怠)하다(게을리하다) 등 아직도 곳곳에 일본어 투의 표현이 즐비하다. 민법의 문장은 모든 법령 문장, 나아가 국민 언어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민법은 오랜 세월을 두고 검증된 내용을 정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법이기 때문에, 다른 법령을 만들거나 법률 전문가가 법률 문장을 작성할 때 민법의 표현을 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제 한글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도층으로 등장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민법에는 ‘催告(최고)’라는 용어가 중요 개념으로 자주 나오는데, 그것은 대부분 일정한 행위를 촉구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한자에 익숙한 중장년 세대는 이 용어의 뜻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르나, 한글세대는 그 뜻을 짐작하기는커녕 읽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그것을 단순히 한글화만 하면 가장 높다는 뜻의 ‘최고(最高)’와 혼동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催告’는 어렵지 않은 표현인 ‘촉구’ 등으로 고쳐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쉬운 민법’은 우리 법률 문화를 국민 중심으로 한 단계 높이는 일이다. 민법은 지금까지는 법률 전문가 입장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일반인으로서는 아예 읽지 못하거나 가까스로 읽어도 그 뜻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도 별다른 고민 없이 방치되어 왔다. 국민이 자기가 산 집의 소유권을 언제 취득하는지, 혼인의 효력이 언제 생기는지를 민법을 보고 쉽게 알 수 없다면, 실질적인 법치주의는 먼 나라 얘기가 될 것이다.

570년 전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으로 일반 백성들에게 글을 읽고 깨치게 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한 것처럼, ‘민법 알기 쉽게 새로 쓰기’를 통해 그동안 법률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민법을 일반 국민에게 돌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송덕수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