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상근]영혼을 지키는 기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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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근 교육복지부장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언론이 어느 대상보다 취재를 제대로 못하는 대상은 바로 언론 자신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의 간부였던 빌 토머스가 1974년 데이비드 쇼에게 미디어 담당 기자가 되기를 권하면서 했던 말이라고 한다.

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미국 언론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자기 회사의 발행인과 편집인의 임명 배경과 계획, 기사의 방향과 수준을 하나하나 짚었다. 미국의 주요 신문을 두 달 동안 분석해 LA 타임스의 영어 오용이 가장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으로 촉발된 폭동 사건을 LA 타임스가 잘못 다뤘다고 시리즈로 비판하기도 했다.

대표적 기사의 하나는 ‘경계선을 넘어서(Crossing the Line)’이다.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의 스포츠 컨벤션 시설인 스테이플스센터 특집이 LA 타임스의 독립성과 신뢰도를 훼손했다며 기자들이 서명에 나서는 등 파문이 확산되자 쇼가 나섰다. 기사는 1999년 12월 20일 일요판 특집(14개 면)으로 게재됐다. 신문사 내부가 아닌 제3자가 원고를 검토해야 한다며 현직에서 은퇴한 전임 편집국장을 추천해서 관철시킨 점이 인상적이다. 6주에 걸친 취재와 기사 작성으로 체중이 6kg 줄었다니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된다.

워싱턴포스트가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저스에게 팔렸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쇼를 떠올렸다. 136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문,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등으로 언론계 최고 영예인 퓰리처상을 47회 수상한 신문. 이런 언론사가 인터넷 기업가에게 매각됐다는 사실은 신문기자인 필자에게 충격이었다.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7일 오전 신문을 펼쳤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언론계 동료와 선후배 역시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어느 기자 지망생은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은 일을 얘기했다. (신문 산업이 이렇게 계속 위축되는데) 기자 되려고 계속 공부해도 되냐며 딸을 걱정하시더란다.

베저스는 “워싱턴포스트가 추구하는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워싱턴포스트가 앞으로도 매각 전과 같은 모습일지에 대해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현직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싱턴포스트의 정신이 계속 이어질까? 퓰리처상의 7개 부문을 한 해에 휩쓸었던 실력이 계속 유지될까? 이런 질문을 던지다 보니 자기 회사를 대상으로 필봉을 휘두르던 쇼의 모습이 새삼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그런데….

워싱턴포스트는 기자정신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자산임을 입증했다. 자기 회사의 새 주인인 베저스를 일요판(11일자)에서 1면 톱과 2개면에 걸쳐 해부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기자 6명이 베저스의 어린 시절, 대학 생활, 창업 및 기업운영 과정의 일화를 전달했다. 베저스의 장점과 성과, 그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함께 소개했다. 베저스와 아마존 모두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기자들은 실명으로 등장하는 11명을 포함해 수십 명을 접촉했다. 객관성 추구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한국에서도 언론이 자기 회사를 인수한 기업인을 대상으로 이런 기사를 쓰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이런 기사를 쓰겠다는 발상 자체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기자정신이 무엇인지를 워싱턴포스트에서 다시 확인했으니까.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워싱턴포스트에서 다시 배웠으니까. 실제로는 그렇게 하든 못하든, 기자가 실현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알았으니까. 꿈과 희망과 이상을 간직하기만 해도 기자생활을 더욱 보람 있게 여기고, 독자를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할 테니….

※데이비드 쇼에 대한 내용은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이재경 교수의 여러 저작을 활용해 종합했음을 밝힙니다.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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