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20>외계(外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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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外界)
―김경주(1976∼)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 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가 팔 없이 태어났다는 건 삶에 적응하기 힘든 태생적 결함이다. 그는 삶의 바깥에서 멀리멀리,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바람처럼 떠돈다. 왜 떠도는지는 자신도 모른다. 그저, 그리 태어난 것이다. 세상의 습속에 순응하며 제도에 동화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바람처럼 사는 사람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해의 바깥, 세상 바깥에서 화가는 오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희구할 뿐이다.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시상(詩想), 누구도 움켜쥐지 못한 선율! 그 천상의 예술을 잡아채려 그는 절벽에 기어올라 가 몇 달이고 입 벌린 채 있곤 한다. 외계, 우주, 더, 더, 넓은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시려! 바람은 시이며 음악이며 영혼이다. 이 세상 밖이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이기도 하고, 생명의 기원(起源)이기도 한 외계. ‘절벽’은 그 외계를 향해 뚫린 구멍이다. 지구인으로서는 불구인 예술가들. 은하수 너머 더 아득한 세계에 이르도록 더 큰 완성을 꿈꾸는 그들은 외계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란, 예술의 완성이나 자기 주체와 자기 대상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뜻이리라. 불구의, 불우하고 외로운 삶만이 천상의 아름다움을 재현해 낸다는 예술지상주의적 예술관이 가슴 시리게 그려져 있다. 전위적 시인 김경주의 시로서는 뜻밖의 고전적 모습이다. 예술가의 전형을 전형적으로 그린 시!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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