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19>시상식 모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시상식 모드
―박상수 (1974∼)

처음 만났지만 차라리 고백을 해버린다면 어떨까? 블랙 미니 드레스에, 펄 립글로스를 바르고는

예전부터 당신을 존경해왔어요

샹들리에 불빛 속에서, 당신은 짓밟혀왔고 평생 자신과 싸워왔군요, 그래요, 알아요, 당신이 내게 오신다면 척추가 무너진 것처럼 인사할 거예요

하지만 상이라는 것은 이제 너에겐 내리막길만 남았다는 저주일 텐데

내내 눈감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네요, 무례하군 참으로 마이너한 에너지다, 오늘 이 자리는 묘하게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있어서, 모아놓으면 병이 돌 것 같은데, 나무들은 비틀립니다 새들은 낮게 날아요 비바람 속 미친 노파가 욕을 해대지만 여기는 스카이 그랜드볼룸

나에 대해 좀더 얘기해주겠어요?

사람들과 손키스를 나누며 당신, 드디어 당신! 녹음한 내 목소리를 억지로 들은 것처럼 벌써 오줌이 마려워, 나는 힙을 조금 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만족해주겠다는 표정으로.

이 시가 실린 시집 ‘숙녀의 기분’은 현재 대한민국 ‘청소녀(靑少女)’들이 사는 모습을 르포처럼 보여준다. 시들의 화자들은 전부 청소녀인데, 연배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시인이 어찌 그리 그들의 일상과 심리를 면밀히 알고 목소리도 생생하게 모사하는지, ‘희한하네!’ 싶을 정도다. 시인은 그저 취향과 호기심으로 그들 세계를 기웃거린 게 아니다. 학교, 학원, 독서실, 아르바이트하는 곳 등의 무대에서 청소녀들이 자신의 실태를 방백(傍白)으로 펼쳐 보이는 시편들은, 주위에 엄연히 존재함에도 눈에 띄지 않았던 평범한 청소녀들과 그들 삶의 심각한 열패감에 주목하게 한다. ‘‘(상품성을 갖춘) 숙녀’라는 기표를 획득하기 위한 우리 시대 소녀들의 계급투쟁 실패기’(시집 해설에서), 하지만 ‘숙녀의 기분’으로 ‘샤라랑, 샤라랑’ 씌어져, 칙칙하지 않다.

도태되지 않으려 각고의 노력을 해서 어른 세계에 진입한 화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시상식장에 한껏 매력적으로 차려입고 참석한다. 주눅이 들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마음으로 화려하고 의례적이고 지루한 주위를 둘러보며, 화자는 그날의 주인공인 수상자를 ‘확 꼬셔버릴까’ 하는 당돌한 생각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삐딱한’ 생각을 한다. 화자가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아마도 유명한 선배일 수상자에 대해 화자는 존경심이 일기는커녕 왠지 심사가 꼬인다. 그래도 정작 그를 만나면 ‘척추가 무너진 것처럼 인사할 거’라고 화자는 자신을 조롱한다. 젊은 여자의 꿈과 절망과 질투의 버무림! 이러면서 자라리. 그래서 혹시라도 운이 닿으면, ‘기득권녀’가 되리.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