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명섭]6·25전쟁의 진실과 역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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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약 6000만 명을 죽인 제2차 세계대전이 세계 현대사에서 그렇듯 약 200만 명을 죽인 6·25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자 최악의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과 독일의 전쟁 책임을 부정하는 것은 전후(戰後)의 전쟁범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6·25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 평화와 통일을 위해 좋다는 미신(迷信)이 횡행하고 있다. 그런 미신이 좌익 전체주의의 속성에 눈멀게 하고, 북한 인권에 눈감게 한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이나 천안함 폭침에 대한 오판도 거기서 나온다. 진실에 기초해야 화해도 가능하다.

어떤 이들은 6·25를 기억하지 않으려면 ‘한국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는 별 생각 없이 외국인들이 쓰는 ‘The Korean War’라는 명칭을 ‘한국전쟁’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Korea’는 북한과 한국을 통칭하지만 한국은 대한민국을 지칭한다. 외국적 맥락에서 번역할 때도 ‘코리아전쟁’이나 ‘한반도전쟁’이라고 해야 침략을 한 북한과 침략을 당한 한국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 6·25전쟁 대신 ‘6·25남침전쟁’을 공식 용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남침’은 자칫 ‘남쪽의 침략’으로 곡해(曲解)될 수 있다. 차라리 ‘김일성전쟁’이라고 명토 박는 것이 낫지만 그러면 스탈린, 마오쩌둥, 박헌영 등의 전쟁 공모 사실이 가려진다.

6·25를 민족통일전쟁으로 미화하지 말고,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적 공모를 직시해야 한다. 폭력적 방법으로 ‘역사적 진보’를 앞당기겠다는 믿음을 ‘사회과학’처럼 포장한 게 공산주의다. 1917년 수립된 2월 혁명정부를 전복시킨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까지 탄압하고 학살했다. 레닌은 자신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명확히 구별하라고 교시했었다. 히틀러와 히로히토에 대한 승전, 동유럽 공산화, 1949년 중국 공산화, 그리고 같은 해 소련의 핵실험 성공 등으로 공산주의가 결국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믿음은 정점에 달했고, 6·25전쟁도 그런 공산화 기획 중 하나였다. 그런데 6·25전쟁은 몇 가지 역설적 결과들을 낳았다.

첫째, 6·25전쟁은 공산화 전쟁이었지만 공산화를 막은 전쟁이 되었다. ‘진보적 민주주의’로 위장했던 공산주의자 중 상당수가 월북하거나 죽었고, 북쪽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했던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하거나 죽었다. 그 결과 휴전선은 일종의 이념적 방역대(防疫帶)가 되었다. 북한 정권은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침투, 끊임없는 간첩 남파 등을 통해 공산화 책동을 멈추지 않았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강해진 사상적 면역력이 공산주의의 삼투(渗透)를 막았다.

둘째, 6·25전쟁은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를 수호했던 전쟁이었지만 휴전선 양쪽에 대한민국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낳은 전쟁이었다. 북한의 전쟁 책임자가 오늘날까지 권력을 세습할 수 있었던 것은 6·25전쟁의 영향이 크다. 6·25전쟁을 ‘미제와 남조선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교육받은 북한 주민은 ‘북침전쟁’에 대한 노여움과 전쟁 재발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령 독재를 옹위해 왔다.

남쪽에서 자유대한은 수호되었지만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 지배체제가 탄생했다. 그 결과 6·25전쟁에서 이룩한 ‘자유수호’의 가치는 손상됐다. 자유주의적 좌파도 전체주의적 좌파와 같은 ‘빨갱이’로 내몰렸다. 역으로 자유주의적 좌파 지식인 중 일부는 유럽의 자유주의적 좌파와는 달리 전체주의적 좌파를 비판하지 못하는 반-반공주의의 역편향에 사로잡혔다.

그 결과 “유엔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1만 명 정도 희생되고 끝났을 것이고, 지금 우리는 통일된 나라에서 중국처럼 경제적으로도 윤택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황당한 역사관까지 나왔다. 1만 명 정도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발상도 문제지만 좌익 전체주의의 만행이 그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보는 확신은 우매하다. 그렇게 되었다면 1960년대 중국 공산당이 벌였던 ‘문화혁명’이나 1970년대 후반 인도차이나 반도의 킬링필드가 한반도에서 먼저 발생했을 것이다.

셋째, 6·25전쟁은 파멸의 순간이었지만 창조의 순간이기도 했다. 6·25전쟁은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과 함께 우리가 진작 버렸어야 했던 봉건적 폐습도 함께 파괴했다. 전쟁으로 촉진된 농지개혁, 인구이동, 신분의식 약화, 국제적 체험 등은 봉건지주층보다 산업자본가들의 손을 들어줬다.

6·25전쟁에서 수호한 자유의 토대 위에서 한국은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진짜 민주주의 국가”라는 유럽인들의 평가를 받을 만큼 민주주의 발전을 이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세대만 사라지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체험한 노인의 지혜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 ‘새로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 될 리 만무하다.

김명섭 객원논설위원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luesai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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