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차라리 백담사로 돌아가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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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 차장
정용관 정치부 차장
1672억 원의 추징금 미납 문제로 연희동 집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보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3년 전 천안함 폭침 사건이 터졌을 때 당시 이명박(MB)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의 고견을 듣겠다며 전 전 대통령과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청와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찬 회동이 진행됐다고 브리핑을 했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와인을 두어 잔 마신 전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빙하는 직원에게 “요즘 청와대에 술 다 떨어졌나. 더 가져와!”라고 소리쳤다. 잔이 거의 비었는데도 술을 따르지 않자 화를 낸 것으로 보인다. YS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당신(호칭은 정확하지 않다), 술 취했나. 그만 가라.” 기분이 상한 전 전 대통령은 먼저 자리를 떴고, 예정에 없던 MB와 YS의 단독 오찬이 30분가량 이어졌다고 한다. 면전에서 “당신, 그만 가라”고 일갈한 YS의 강기(剛氣)나 현직 대통령이 주재하는 자리에서 도중에 벌떡 일어나 나가 버린 전 전 대통령의 낯 두께나 둘 다 보통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전 전 대통령과 YS가 화기애애한 오찬 시간을 보냈을 리는 만무했다. 집권 3년차인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야말로 국민의 자존을 회복하고 나라의 밝은 앞날을 여는 ‘명예혁명’”이라며 전 전 대통령을 감방에 처넣은 당사자가 바로 YS 아닌가. 지금도 “검찰의 소환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겠다”는 골목성명을 내고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갔던 전두환, 진노한 YS, 다음 날 새벽 검찰의 전두환 압송 작전 등이 영화 속 장면처럼 생생히 스친다.

그랬던 YS가 1997년 대선 직후 전 전 대통령을 사면한 이유는 뭐였을까. 2001년 나온 김영삼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나온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을 내 임기를 마치기 전에는 석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당선자인) 김대중 씨는 전두환 노태우 등을 사면하겠다는 내 말에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좋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했다.” 결자해지의 심정이었는지,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전 전 대통령은 그렇게 ‘무기수’의 신분을 벗었다. 그의 족쇄가 되고 있는 추징금 문제만 빼면….

그로부터 15년하고도 6개월이 흘렀다. 그사이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는 전 전 대통령은 국민을 조롱이라도 하듯 호화호텔과 골프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해왔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정치보복으로 비칠까 우려한 듯 추징금 환수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노무현 정부 때도 약간의 노력은 있었으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MB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10년 이상 쌓여온 일인데 역대 정부가 해결 못하고…”라고 지적한 건 나름의 근거가 있다.

민주당은 6월 임시국회에서 ‘전두환 추징법’을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할 것”이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에도 상당히 고무된 듯하다. 허나, 여야가 전두환 추징법에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 금융실명제 도입 이전에 자식들에게 증여됐을 가능성이 있는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끝내 찾아내 환수할 수 있을지, 정치적 논란만 벌이다 또다시 흐지부지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전 전 대통령에게 한마디는 하고 싶다. “부부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하니 백담사든, 고향 근처의 사찰이든 좋으니 그만 가라”라고. 기왕이면 연희동 사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골목성명’ 하나 내고 말이다. 혹시 정에 약한 많은 국민이 측은지심을 보일지 누가 아는가.

폐렴 증세를 보이고 있는 YS는 꼭 30년 전 자신이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서울대병원의 바로 그 방에 두 달째 입원해 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도 자신이 쌓은 업(業)을 서서히 정리하는 것, 그것 또한 역사의 순리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추징금 미납#대통령#김영삼#전두환#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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