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김 여사와 미스터 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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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골든아이’는 1995년 개봉 당시 파격적 캐스팅으로 화제가 됐다. 새로운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의 등장과 함께 그의 상관 M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지난해 ‘007 스카이폴’로 퇴장할 때까지 여배우 주디 덴치가 MI6를 이끄는 강철 같은 여성으로 열연했다. 1991년 영국 정보기관의 첫 여성 책임자로 임명된 스텔라 리밍턴이 M의 모델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 파워는 다른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가. 한국에선 자동차 운전이 서툴러 도로에서 쩔쩔매는 여성을 비아냥거리는 ‘김 여사’ 시리즈가 기세를 떨친다.

▷밭에서 주무시는 김 여사, 세차하려고 물에 불리시는 김 여사, 계모임 하는 김 여사…. 어처구니없는 주차와 주행, 사고 장면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돈다. 네이버 사전은 ‘김 여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장의 부인이 자가용을 끌고 다닌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여성 운전자 전체를 비하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주로 남을 욕하거나 비아냥거릴 때 자주 쓰이며, 만약 친한 사이에서 쓰면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김 여사는 ‘여성은 운전이 서툴다’를 전제로 무개념, 민폐형 운전자로 여성을 싸잡아 비하한 호칭이다. 처음엔 초보 운전자들이 공감할 만한 실수로 웃음을 주었지만 차츰 사고 낸 사람을 여성으로 낙인찍어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어제 본보에는 불특정 다수 김 여사의 억울함을 덜어주는 기사가 실렸다. 운전면허 보유자 중 남녀 비율은 6 대 4로 엇비슷한데, 한 해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 중 90%는 ‘미스터 김’ 즉 남성이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김 여사 때리기‘는 ‘○○녀’에 대한 마녀사냥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남’이란 말에 비해 ‘된장녀’ ‘개똥녀’ ‘루저녀’ ‘국물녀’ 등 유독 ‘○○녀’란 표현이 자주 출몰한다. 여성을 괴물로 만든 뒤 집단 공격하는 현상에는 여성 비하와 성차별 의식이 알게 모르게 스며 있다. 지역 이념 계층 세대에 이어 성별로 패거리를 나누는 것, 부박한 우리 시대와 문화의 한 단면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김 여사#여성 운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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