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유영]‘칼퇴’를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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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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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경제부 기자
김유영 경제부 기자
오늘도 야근이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15년차 서모 과장은 한숨을 쉰다. 특별히 처리할 업무는 없는데 부장님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칼같이 퇴근하자니 눈치가 보인다. 그는 야근을 일주일에 두어 번 한다. 야근이 만성화되니 낮에 ‘적당히’ 일하는 게 습관이 됐다. 상사 몰래 인터넷 쇼핑을 하고, 치과에 슬쩍 다녀오기도 한다.

근로시간에 관한 한 한국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국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사람이 일하는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길다. 하지만 서 씨의 사례처럼 의미 없는 야근이 생산성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꼽힌다.

정확히 4년 전 IBK기업은행이 그랬다. 평균 퇴근 시간이 자정에 가까운 지점도 있었다. 한 직원은 “회사와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니 삶의 낙이 없었다. 집은 오히려 숙소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은행은 2009년 획기적인 제도를 마련했다. 오후 7시가 되면 직원용 컴퓨터를 강제로 끄고 퇴근 시간을 부서장 평가에 반영했다.

처음에는 ‘무식한 방법이다’ ‘일할 시간이 부족할 거다’란 우려가 나왔다. 기우(杞憂)였다. 직원들은 오히려 빡빡하게 일했다. 1시간 넘게 늘어지는 회의를 하거나 불필요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관행이 없어졌다. 직원들은 “퇴근 후 가족과 외식하고 영화관을 가며 대형마트도 둘러본다. 드라마에서나 나옴 직한 삶이 일상이 됐다. 사무실에서 얻지 못했던 답이 쉬면서 불쑥 떠오를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오래 일하는 게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 영국은 1990년대 후반 창조경제(creative economy)를 내걸었다. 영국의 세계적 디자인 회사인 키네 듀포트의 디자이너들은 주간회의에서 자신이 일한 시간을 그래프로 그린다. 근무 시간이 긴 사람은 눈총을 받는다. 창의성이 승부를 가르는 분야에서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어 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시간이 곧 돈인 직종에서 비용을 많이 썼다는 이유도 있다. 이곳의 한국인 디자이너 최세근 씨는 “한국과 달리 업무 결과만 놓고 평가하는(result-oriented) 문화”라고 전한다.

새 정부는 근로 시간을 단축해 삶의 질을 높이겠다고 했다. 남들을 쫓아가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시대’엔 노동력을 투입한 만큼 성과가 나왔다. 근면은 압축성장에 기여했다. 경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은 쫓을 대상이 없다. 일하는 시간만 많아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됐다. 선도자(first mover)로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한다.

오늘도 국내 굴지의 모 대기업 임원들은 비상 상황이라는 이유로 오전 6시 반까지 출근한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서 과장은 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두어 번 야근할 것이다.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쉬어야 남들이 안 하거나 못하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다. 이게 창조경제 시대에 살아남는 길이다. 내수(內需)를 살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김유영 경제부 기자 abc@donga.com
#칼퇴근#야근#근로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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