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문정희]문학과 정치권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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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돌아온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집 현관 앞에 기자와 카메라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노벨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순간 우박이 쏟아지듯 카메라 셔터 소리와 플래시가 그녀를 향해 터져 나왔다. 그때서야 사정을 이해한 그녀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그들은 ‘언젠가 이 여자에게 상을 줘야 할 텐데’라며 걱정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흥분하고 기뻐해야 하나요. 난 이미 유럽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으니 하나가 더 늘었을 뿐이네요.” 87세로 노벨 문학상(2007년)을 받은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이야기이다.

상(賞)도 부럽지만 그녀의 자유로움이 더없이 부러운 장면이었다. 수상 후에도 그녀는 “노벨상은 재앙이었어. 사진 찍기와 인터뷰로 나의 삶이 망가져 버렸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고독이 아니겠는가.

자유란 작가에게 숨쉬는 것과 같은 것이고, 고독은 예술신(神)과 대결할 수 있는 순수한 밀도와 외로운 상태를 말하는 것일 게다.

작가들의 유엔이라고 하는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IWP)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세계 35개국에서 온 문인들과 3개월을 함께 살았다. 마치 국제대회에 출전한 코리아 대표처럼 나는 밤새워 글을 써서 발표를 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알아차렸다. 작가에게 가장 큰 선물은 자유로이 던져지는 것이고 이 프로그램은 바로 그것을 실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른 나라 작가들에게 뒤질세라 조바심치는 경쟁심 자체가 부자유한 것이었다. 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의 시인이고 지금 여기 자유와 고독이라는 최고의 환경 속에서 시혼(詩魂)을 불태우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 왜(why?)라는 질문을 맘껏 던질 수 있는 자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왜? 라는 말을 정치권력을 향해 던지며 비판하고 저항하다가 감옥에 간 시인들을 알고 있는 나는 우선 자유라는 말이 정치구호가 아니라 사방에 아주 쉽게 굴러다니는 것이 신기하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 새로운 자유를 연습했다. 자신을 게이(gay)라고 소개한 작가와 편견 없이 친했으며, 검은 맨발의 시인과 토론했고, 취재 온 금발 여기자에게 반해 그녀를 따라 사라져버린 남미의 소설가를 인정했다.

제멋대로는 아름다웠다. 그래서 창의성은 충만했고 프로그램은 축제였고 우리는 행복했다.

과도한 애국심으로 상대와 걸림돌을 만들기보다 불의(不義)와 부정(不正)과 폭력에 대해서 과감히 “아니요(No!)”를 외치는 작가들의 모국은 어쩌면 제도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각자의 모국어(母國語)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새 대통령 취임사에 문화라는 단어가 19회나 언급되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20회였다. ‘문화로 더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고, 문화가 국력이라는 말도 했다. 상상력에 대한 가치도 크게 언급했다.

참 그럴듯한 취임사이지만 문화, 그중에서도 문학은 단기간에 승부가 나지 않는 분야라는 점에서 마음이 쓰였다. 이 정책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효력이 임기 중에 업적으로 나타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한히 투자해 주어야 하는 것이 문화요, 특히 문학 분야가 그렇다. 문학은 결코 유튜브 속의 스타 싸이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정권은 5년이지만 문학의 수명은 100년, 천년이다.

새 정부는 2%의 예산을 문화를 위해 할애했다. 해당 장관은 한류에 대해 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환경 조성에 힘쓰겠다고 했다. 일단 문화 융성을 위해 국가가 큰 지원을 하겠다는 것과 그를 향한 태도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창작은 자유로이 두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마중물로서 전폭적인 지원만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1970년대 초 ‘어느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라는 이름을 달고 40여권의 시집이 출판된 적이 있다. “민족중흥의 서광이 비치는 시대, 문화발전의 고무와 비약과 쇄신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고자”한다는 취지문과 함께 그 시집들을 지원한 것은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였다. 솔직히 말해 그때 시집을 낸 시인들이 고마워했는지는 모르지만 누구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생래적으로 이상(理想)을 추구한다. 현재가 낙원이라고 하더라도 좀더 나은 미래를 향해 끝없이 부정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권력을 사랑하는 방법은 찬사나 칭송이 아니라 질문과 비판과 저항이다. 어용(御用)이나 관변(官邊)작가나 침묵의 비겁자가 아니라 진정 살아있는 정신을 원한다면 권력자는 어렵지만 그런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책과 시스템으로 돕되 창작인은 자유롭게 두어야 하며 비판과 저항으로 표출하는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건강하고 싱싱한 권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언젠가 한국작가도 세계에서 모여든 카메라 앞에 서서 “노벨상이 나의 소중한 자유와 고독을 방해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라고 당당하고 멋지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poetm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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