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염희진]아버지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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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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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희진 산업부 기자
염희진 산업부 기자
호텔 홍보담당자에게서 은퇴한 남성들의 브런치(brunch) 모임이 부쩍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늦은 아침, 혹은 이른 점심을 뜻하는 브런치는 미국드라마 ‘섹스앤더시티’를 통해 대중화된 후 한국에서 20, 30대 여성의 전유물로 통했다. 하지만 은퇴 후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기는 실버세대가 늘며 호텔은 이들을 겨냥한 메뉴를 속속 내놓고 있다.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는 뷔페를 이용하는 전체 고객 중 50∼70대가 70%를 넘었다고 한다.

커피전문점에서도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주 고객으로 떠오르고 있다. 평일 오후, 서울 시내에 있는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보자. 카페베네가 서울 명동지역 5개 점포를 분석한 결과, 50∼70대 남성 비율이 전체 고객의 30%를 넘었으며 가장 많이 찾는 시간대는 오후 2∼3시로 집계됐다. 다방을 찾던 사람들이 카페전문점에 흡수된 것이긴 하나 60대 이상 남성들이 가장 즐겨 찾는 메뉴가 아메리카노인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밥값보다 비싼 쓰디쓴 커피를 이해하지 못하던 이들의 생각과 입맛이 많이 바뀐 것이다.

이제 막 브런치와 아메리카노를 즐기기 시작한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베이비붐 세대’로 불린다. 1955∼1963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는 전체 인구의 14.6%를 차지한다. 2010년부터 은퇴하기 시작했으며 2017년이면 매년 평균 15만 명의 은퇴자가 쏟아진다는 전망이 있다.

‘거대 인구집단’으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 있는 계층이지만 이들처럼 가지고 있는 소비력에 비해 갈 곳이 마땅찮은 세대도 드물다. 여가시간은 하루 평균 12시간에 달하는데 여가를 즐길 공간은 없는 게 현실이다. 집에만 있으려니 아내의 눈치가 부담스럽고, 혼자 백화점에 가자니 옆집 아줌마와 마주칠까 두렵다. 노인정은 어감부터 늙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일부러 안 간다는 사람을 여럿 봤다. 결국 이들에게 가장 만만한 곳은 산이었다. 소비 침체기에 아웃도어 업계가 승승장구하는 건 50, 60대 남성의 구매력 덕분이라는 분석이 있다. 산이 은퇴한 남성의 새로운 사회적 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양복에 쓰던 돈을 등산복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한 번도 주요 소비계층으로 조명되지 못한 세대였지만 사정은 달라지고 있다. 기자는 지난해 서울에 있는 등산복 매장을 취재하면서 베이비붐 세대의 소비욕구를 등산바지 구매 행태에서 읽을 수 있었다. 매장 담당자는 유일하게 등산바지를 ‘(색)깔별로’ 구입하는 고객군(群)은 60대 이상 남성뿐이라고 말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엄지족’ 아저씨의 힘으로 등산바지 재구매율이 높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들의 특징은 한 번 꽂힌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것. 다른 소비층보다 고객관계관리(CRM)에 유리하다고 했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아버지가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브런치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스마트폰으로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낯선 장면이지만, 고령화 사회에서 나이에 따른 취향을 논하는 시대는 점점 저물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를 잡기 위한 유통업계의 마케팅 전쟁도 이제 막 시작이다.

염희진 산업부 기자 salthj@donga.com
#브런치#커피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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