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하태원]11년 전 朴 당선인이 본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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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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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원 논설위원
하태원 논설위원
구글 회장 에릭 슈밋의 딸 소피의 방북기를 읽다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떠올렸다. 박 당선인의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2007년)가 연결고리였다. 19세의 소피는 3박 4일의 평양 경험에 대해 “북한은 국가 단위의 ‘트루먼 쇼’ 같다”고 갈파(喝破)했지만 박 당선인은 2002년 5월의 3박 4일 체류에 대해 “남북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준 기간”이라고 적었다. 박 당선인의 방북 동기는 “과거의 아픔과 기억을 뛰어넘어 남북관계를 잘 풀기 위한 결심”이었다.

당시 방북은 박 당선인의 대북관(對北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국빈급 외국 인사가 머무는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마주 앉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을 ‘통 크게’ 사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리라. 한 시간 동안 북한의 절대자와 독대를 마친 박 당선인은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 그들도 약속한 부분에 대해 지킬 것은 지키려고 노력한다. 나는 북한 방문을 통해 이런 확신을 얻었다”고 썼다. 박 당선인이 대북정책의 근간으로 내세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11년 전 바로 이 순간 성안(成案)된 셈이다.

북한을 믿기 시작한 이유는 김정일이 자신과 맺은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당시 7개 합의 중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동해선 철도 연결, 남북축구대회, 금강산댐 남북공동조사단 구성, 6·25전쟁 당시 행방불명된 국군과 민간인 생사 확인 등 5개 항이 이뤄졌다.

하지만 이산가족면회소 설치, 동해선 철도 연결 등이 100% 남측의 비용부담이 아니라 북한도 돈을 내야 하는 방식이었다 해도 성사됐을까. 박 당선인이 방북한 후 6년 2개월이 지난 2008년 7월 완공된 면회소는 단 두 차례 상봉행사를 치른 뒤 개점휴업 상태다. 남북 합의로 정했던 시험운행 일자가 숱하게 연기된 끝에 동해선 철마(鐵馬)는 2007년 5월 기적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그때뿐, 기적 소리는 또다시 깊은 침묵에 빠졌다. 여전히 2002년의 방북 성과가 지도자 간 신뢰를 바탕으로 마음이 통한 결과라고 믿는다면 남북관계에 관한 한 박 당선인의 판단은 너무 순진한 게 아닐까.

11년 전 박 당선인이 본 북한의 모습이 허상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역설적으로 ‘김씨 왕조’의 결심 없이 북한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장 명확하게 목도한 사람이 박 당선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遺訓)이라고 했던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그제 “실제적이고 강도 높은 국가적 중대조치를 취할 단호한 결심”을 표명했다. ‘높은 수준의 핵실험’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자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무효화하는 발언이기도 하다.

북핵 폐기를 전제로 과감한 대북지원을 약속한 이명박 대통령의 정책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박 당선인 역시 북핵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명확하다. 북핵 폐기의 원칙은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다. 하지만 이제 북핵 게임의 법칙은 완전히 변했고 박 당선인의 신뢰프로세스 역시 궤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내달 25일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의 출발점은 ‘이제는 달라진’ 북한을 직시하는 것이다. 방북 마지막 날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핀 평양∼개성 구간 도로를 달리며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아카시아 향에 취했던 ‘5월의 봄’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넘겨야 한다. 지독한 북한의 핵겨울은 더욱더 깊어지고 있고, 더불어 한반도 안보도 흔들리고 있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에릭 슈밋#박근혜#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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