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현미]행복을 ‘사는’ 사람들

  • Array
  • 입력 2013년 1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고대 그리스인들은 체액을 혈액 점액 담즙 흑담즙 4가지로 구분하고, 이 체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의 기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정리한 ‘4체액설’로 다혈질인 사람은 명랑하고 사교적이며, 점액질인 사람은 냉정하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담즙질인 사람은 성급하고 화를 잘 내지만 용감하며, 흑담즙질인 사람은 사색적이고 우울하다고 한다. 우울감으로 번역되는 멜랑콜리란 말도 그리스어 ‘melan(검은)’과 ‘chole(쓸개)’에서 나온 것이다.

감정 작동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인류의 오랜 호기심은 뇌과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감정의 저장고가 뇌냐 심장이냐의 끊임없는 논쟁도 뇌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이 도착하면 뇌는 상황에 따라 희로애락을 구별해 그에 맞는 화학적 전달물질을 온몸으로 전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손이 떨리는 반응은 아드레날린 작용이며, 천국에 있는 것같이 황홀한 기분은 체내 페닐에틸아민의 농도가 높아진 것이다. 연인과 손끝만 스쳐도 온몸이 짜릿한 것은 ‘애무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는 ‘화학 공장’이며 감정은 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분자’로 표현되기도 한다(자세한 설명은 마르코 라울란트의 책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감정의 비밀’을 보라).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000년대 초 출간한 ‘휴먼 퓨처(human future)’에서 현대 신경과학의 발달을 자동차 덮개를 들어올려 엔진을 볼 수 있게 된 것에 비유했다. 반면 정신병을 심리적 원인에서 찾으려 한 프로이트주의는 원시인이 뚜껑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자동차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 한 것과 같다고 했다. 자동차 뚜껑을 열어 엔진을 들여다보게 된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바뀔까. 후쿠야마는 신약 개발이 가져올 포스트 휴먼 단계를 이렇게 내다봤다.

“무기력한 사람은 활기찬 성격이 될 수 있으며, 내성적인 사람은 외향적으로 바뀔 수 있다. 수요일에는 이런 성격을, 주말에는 저런 성격을 선택할 수 있다. 이제 우울하다거나 불행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정상적으로 행복한 사람들까지 중독이나 부작용 또는 장기적인 뇌손상을 걱정하지 않고도 스스로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삶의 질을 개선해주는 물질들이 ‘해피 드러그(happy drug)’라는 이름으로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우울증 치료제 프로작,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 노화의 흔적을 없애주는 보톡스는 이 분야의 고전이다. 매일 아침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세로토닌 영양보충제를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세로토닌은 행복감을 줄 뿐 아니라 배고픔을 잊게 해 날씬해지는 알약으로 각광받는다. 낮에는 얼굴에 히알루론산을 넣어 촉촉하고 탱탱한 도자기 피부를 만들어주는 일명 ‘물광주사’를 맞는다. 얼굴 라인이 불만인 사람들에게는 볼과 턱의 도톰한 지방층을 녹여주는 ‘아큐스컬프트’ 시술이 인기다. 불과 10여 분 만에 당신도 연예인의 ‘브이라인’ 얼굴을 가질 수 있다. 밤이 되면 ‘사랑의 묘약’으로 통하는 옥시토신 스프레이로 최상의 오르가슴을 맛보는 삶. 이미 현실로 다가온 멋진 신세계다.

그러나 사들인 행복의 유효기간은 짧다. 1회에 수십만 원 하는 ‘물광주사’ 효과가 수개월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화학자인 라울란트는 “우리의 삶에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바로 감정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행복한 상태만 유지된다면 우리에겐 희로애락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기쁨 슬픔 사랑 욕망 고통과 같은 감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알약 하나에 담아 삼킬 수는 없다.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khmzip@donga.com
#행복#감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