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형준]버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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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김형준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대통령선거가 석 달여 남은 상황에서 역사 논쟁이 뜨겁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5·16과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에 대해 쏟아 낸 거칠고 고답적인 발언들이 빌미가 됐다. 최근 박 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가지 판결이 있기 때문에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밝혔다. 당장 야권은 국민과 역사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발언이라고 공격했다. 인혁당 사건 당사자인 민주통합당의 유인태 의원은 “박 후보가 한 얘기는 결국 고문으로 조작한 이 사건에 대해 ‘인정 못하겠다. 그분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있어서 나온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변혁적 리더십 vs 거래적 리더십

역사 논쟁에 대해 박 후보가 일관성 있게 내세우는 논리는 “과거에만 묻혀 있으면 안 된다” “찬반 논란이 있기 때문에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역사 인식이 미래 행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박 후보 논리대로라면 역사는 존재할 필요가 없고, 역사를 통해 배울 것도 없다. 은폐되고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결코 죽어 땅에 묻히지 않는다. 반드시 그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이자 미래이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일 뿐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 어떤 왜곡으로도 부정될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만약 역사적 사실을 판단의 영역으로 몰고 가면 역사 왜곡과 사회 혼란을 가져올 것이고, 결국 극단과 대결의 정치가 판을 치게 된다. 5·16은 민주 헌정을 무력으로 파괴한 군사정변이고, 인혁당 사건은 유신시대의 사법 살인이었다는 사실은 역사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미국 대통령 리더십을 실증적으로 연구한 학자들 주장에 따르면 대통령이 어릴 적 성장하면서 형성된 성격과 인지 구조가 향후 통치 스타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가령 대통령이 부정적인 역사 인식과 자기 신념에 갇히게 되면 소통과 통합은 사라지고 결국 실패한 대통령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잘못돼 있으면 잘못된 역사가 반복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제임스 번스 교수는 리더십이 실제로 수행되는 양식에 따라 ‘변혁적(transformational) 리더십’과 ‘거래적(transactional) 리더십’으로 구분했다. 전자는 지도자가 강한 도덕성, 예리한 역사의식, 저항하기 어려운 설득력, 누구나 희구하는 미래의 비전,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상징성을 통해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리더십이다. 이런 변혁적 리더십이 행사될 때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국민의식을 고취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가 지향하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국민 에너지를 결집시킬 수 있다. 국가 통합을 위해 남북전쟁을 불사했던 링컨 대통령,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런 리더십의 전형이다.

박근혜, 대한민국의 딸로 거듭나야

반면에 후자는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가 근본적으로 상호 이익 관계라는 개념에 기반을 둔다. 이런 ‘거래적 리더십’은 그때그때 발생하는 일을 처리하거나 관리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조직의 방향을 제시하거나 정책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국민을 설득해 하나로 통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으로는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그저 거래적 리더십의 아류(亞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이럴 경우 박 후보는 “100% 대한민국을 만들어 5000만 국민의 역량과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박 후보는 “진정한 개혁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고 아버지가 못다 한 꿈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 이유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잘못된 것이다.

박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딸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산을 넘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버지처럼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오연(傲然)한 자세를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하는 극단적 반대 세력이 나오게 된다. 8월 중순 한국미래전략연구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근혜-안철수 양자 대결 시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부동층이 19.3%였다. 이들이 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로 가장 많은 41.7%가 ‘역사의식에 공감할 수 없어서’라고 응답했다. 이런 조사 결과가 주는 함의는 박 후보가 아버지의 부정적 유산을 버려야 비로소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박 후보에게 역사 인식의 대전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것이다.

김형준 객원논설위원·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joon57@mju.ac.kr
#대통령선거#역사 논쟁#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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