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황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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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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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히로히토(裕仁)는 알아도 이희(李熙)는 몰랐다. 아키히토(明仁)는 알아도 이척(李척)은 몰랐다. 쇼와(昭和)와 헤이세이(平成)는 귀에 익은데 광무(光武)와 융희(隆熙)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희와 이척은 조선 26대 왕 고종과 27대 왕 순종이다. 부자(父子)는 대한제국의 첫 황제와 마지막 황제로서 각기 ‘광무’와 ‘융희’를 연호로 썼으니 아버지는 광무제, 아들은 융희제다. ‘고종’ ‘순종’은 사후에 붙인 묘호(廟號)다.

두 황제가 잠든 곳이 서울 서대문구의 우리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평일 아침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洪裕陵)에 관람객은 나 혼자였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홍릉, 순종황제는 유릉에 묻혀 있다. 홍릉의 봉분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일반 관람이 제한돼 있었다. 능에 상주하는 남양주시 문화관광해설사에게 가까이에서 참배하고 싶다고 간청했더니 “전주 이씨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종친회 외엔 참배객이 드문 듯했다.

해설사의 ‘배(拜·절하시오)’ ‘흥(興·일어나시오)’ 구령에 따라 국궁사배(鞠躬四拜·왕에게 4번 절해 예를 갖춤)를 했다. 풀 위에 손을 포갤 때마다 약한 전류(電流)처럼 애틋한 기운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100년도 안 된 황제릉이건만 봉분을 두른 병풍석은 군데군데 틈새가 벌어지고 검버섯이 핀 것처럼 덕지덕지했다. 영혼이 나와서 머문다는 혼유석(魂遊石)엔 윤기라곤 없었다. 고종의 장례를 주도한 조선총독부가 예우와 정성을 다했을 리 없다. 파란 많은 황제의 불우한 말년이 떠올랐다.

능 터는 고종이 조성했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일제는 왕의 무덤인 능(陵)을 못 쓰게 하고 일반 왕족의 무덤인 묘(墓)로 격하하려 했다. 왕실에선 서울 청량리 홍릉에 모셨던 명성황후를 이곳으로 천장(遷葬)해 고종과 합장하는 묘안을 짜냈다. 새로 능을 만든 게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옮겨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926년 순종 사후엔 서울 능동 유릉의 순명효황후를 모셔와 합장했다. 황제들이 황후의 능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고종은 44년간 재위했다. 조선 왕 중 영조 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 통치했다. 영조는 정조와 사도세자, 숙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친숙하게 느껴지는데 고종은 왠지 선뜻 끌리지 않고 낯설다. 고종시대사를 폄훼하고 고종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축소한 일제 식민사학 탓이 크겠지만 우리 스스로 기억하기 싫은 역사의 무능한 군주라 치부하고 애써 무관심했던 건 아닐까.

고종은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자마자 척사파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개화를 밀어붙였다. 대한제국기의 광무개혁은 입헌군주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혁신책을 망라했다. 개혁의 토대인 군주권 강화를 위해 의정부 대신과 소장 개화파, 처족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을 활용했고, 제국주의의 풍랑 속에서 열강을 상대로 기민한 줄타기 외교를 벌였다. 해외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강제 퇴위당하면서 항일운동의 불을 댕겼다.

군주로서 이런저런 한계를 드러내며 망국(亡國)에 이르렀지만 개혁과 구국을 위한 고종의 노력을 마냥 깎아내릴 수만은 없다. 무모한 전쟁으로 이웃을 유린하고 250만 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군주 일가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神聖)으로 치장해 떠받드는 나라도 있다.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지 않고, 가르칠 의지도 없는 자들의 인식이 얼마나 비뚤어질 수 있는가를 지금 똑똑히 보고 있다. 그들에 맞서 우리 황제를 위한 찬가를 부를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일본에 어떻게 당했는지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오늘과 내일#이형삼#고종#한일 과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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