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끝별]‘문(門)’ 앞에 서서

  • Array
  • 입력 2012년 7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어느 집에나 문이 있다/어느 집의 문이나 그러나/문이라고 해서 모두 닫히고 열리리라는/확증이 없듯//문이라고 해서 반드시/열리기도 하고 또 닫히기도 하지 않고/또 두드린다고 해서 열리지 않는다”(오규원, ‘문’)

문을 내기 위해서는 먼저 벽이나 담을 뚫어야 한다. 그 뚫린 자리에 경첩과 문고리가 달린 문짝을 넣어줘야 비로소 문은 완성된다. 그러나 그렇게 문이 생겼다고 해서 어느 문이나 반드시 열리는 것은 아니다. 열리지 않는 문은 다시 벽이나 담이 된다. 새로운 문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요즈음이다.

문에 관한 두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하나.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의 문은 지옥으로, 다른 하나의 문은 천국으로 통한다. 두 개의 문 앞에는 문지기들이 서 있다. 한 문지기는 진실만을, 다른 문지기는 거짓만을 말한다. 자, 우리는 어떻게 지옥으로 가는 문을 피할 수 있을까. 그 둘.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에는 하나뿐인 문이 나온다. ‘법’이라는 거대한 문으로 들어가고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골 사람이 나온다. 시골 사람은 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에서 ‘두 개의 문’은 일차적으로 남일당 건물 5층 계단 끝에 있던 두 개의 문을 지칭한다. 하나의 문은 망루가 세워진 옥상으로 가는 문이었고, 다른 하나의 문은 창고로 가는 문이었다.

새로운 門에 대한 열망 뜨거워


경찰들은 5층 계단 끝에 두 개의 문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투입되었다. 옥상에서는 또 다른 ‘두 개의 문’이 대치 중이었다. 푸른 망루의 문과 잿빛 컨테이너의 문이었다. 철거민들은 억울한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세워 올린 망루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경찰특공대원들은 진압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의 문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대 자본에 쫓긴 철거민들에게는 올라갔으되 내려오는 문이 없었고, 거대 권력에 의해 투입된 경찰특공대원들에게는 뛰어내렸으되 다시 올라가는 문이 없었다. 그들은 물과 시너처럼 적대적이었고, 물 대포와 화염병으로 서로를 겨누었다. 불꽃이 튀었고 화염에 휩싸였던 옥상은 생지옥이었고 그대로 죽음의 감옥이 되었다.

오래전, 교수 임용을 위한 최종 면접에서였다. 한 면접관이 물었다.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라면 학생지도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교정 도처에 긴박하게 나붙은 현수막과 대자보를 보고 왔던 터라 이 물음에는 그 대학의 실제상황이 담겼구나 싶었다.

당황할수록 솔직한 정공법으로 가야 하는 법. 나는 “왜 점거를 하는지 학생들의 얘기를 먼저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역시 질문은 되돌아왔다. 그래도 계속해서 점거농성을 풀지 않는다면 지도교수로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머릿속 CPU 속도를 광속으로 돌려봐도 다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학생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두 개의 문’을 보고 나오는데 그때 그 면접이 떠올랐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망루든 타워크레인이든, 다리의 난간이든 아파트의 옥상이든, 제 스스로 그 끝을 향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점거를 하고 농성을 하고, 파업을 하고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제 목숨과 제 밥줄을 걸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지 일단 그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약자이고 소수자이고 소외자라면 더더욱. 그들의 목소리에 일단 귀기울여보는 것이야말로 벽이나 담에 문을 내는 첫 구멍을 뚫는 일이다. 어떤 문을 낼 것인가는 대화와 타협 그 이후의 문제다.

다시 우화로 돌아가, 지옥으로 가는 문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아무 문 앞에나 가서 그 문 앞에 선 문지기에게 “지옥문 앞에 서 있는 문지기가 진실을 말하는 문지기입니까”라고 묻는다. “예”라고 하면 반대쪽 문으로 가고 “아니요”라고 하면 그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그런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카프카의 시골 사람은 ‘법’의 문 앞에서 한평생을 기다리다 죽는다. 죽기 직전의 시골 사람에게 문지기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맙소사! 그러니까 그 문은 애초부터 벽이자 담이었던 것이다.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법’이라는 이름의, 폐쇄되고 단절된 ‘없는 문’이었다.

상대방 목소리에 먼저 귀기울여야

닫히거나 막혔기에 ‘없었던’ ‘두 개의 문’ 앞에서 살아남은 한 경찰특공대원의 서면진술서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사망한 철거민이나 우리 대원들 모두 사랑하는 우리 국민입니다.” 법과 권력이, 민생과 경제가, 외교와 안보가, 정치와 선거가 모두 ‘우리 국민’들이 오고가고 들고날 수 있는 ‘하나 된’ 문을 찾았으면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공권력과 거대한 자본의 힘으로만 일방통행하는 ‘없는’ 문을 넘어서!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동아광장#정끝별#두개의 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