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윤덕민]참전용사 유해발굴 멈춰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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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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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민 국립외교원 교수
윤덕민 국립외교원 교수
35년간 베트남 정글에 방치됐던 박우식 소령의 유해가 2002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와이에 있는 미 육군 중앙신원확인소는 미군 헬기 잔해에서 발굴한 시신이 한국군 박우식 소령임을 밝혀냈다. 미군 헬기를 타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귀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귀환은 거의 우리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른 나라였다면 대통령도 모든 일 제쳐두고 귀환을 마중할 정도로 중요한 국가적 행사였을 것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였는지 모른다.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용사들에 대해서도 소홀히 했다. 나라를 떠나려는 유가족이 나올 정도였다.

고국산천에 13만명 묻혀있어

6·25전쟁 이후 북한 땅에 묻힌 국군 전사자로는 처음으로 12명의 용사가 25일 귀환했다. 함남 장진호 협곡에서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돼 영하 30도를 넘는 추위 속에서 싸우고 싸우다 산화한 그들이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산화한 12명의 유해가 62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일곱 살과 네 살의 남매와 아내를 두고 나라를 위해 입대한 이갑수 일병은 비록 백골이지만 백발이 된 남매를 만날 수 있었다. 10년 전 박우식 소령의 귀환과는 달리, 이 용사들의 귀환을 대한민국은 ‘국가원수급’ 의전으로 정중하게 맞이했다. 대통령이 거수경례로 직접 이들을 마중했고 21발의 조포가 울려 퍼졌다. 62년간 지하에서 ‘한’을 품고 있던 그들도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조금이나마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정말 잘한 일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기회가 됐다. 용사 12인의 귀환은 휴전선을 지키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정말 좋은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박우식 소령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돌아온 용사들도 우리가 아닌 미국이 유해를 발굴한 것이다. 미국은 1990년대 초 북한과 5년 이상 걸친 30여 차례의 회담을 통해 북한에서 실종된 미군 유해를 발굴하기로 합의했고 격전지였던 장진호 지역에서만 2005년까지 226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하와이로 옮겨진 유해 중 12구가 정밀검사를 통해 한국군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들은 6·25전쟁 당시 미군에 배속됐던 카투사(KATUSA)들로 미 7사단에 배치돼 역사적으로 최악의 전투였던 장진호에서 미군과 함께 산화했다. 만일 그들이 미군과 같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고국으로 귀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산화한 용사들의 유해 수습을 남이 찾아주는 요행에 맡겨서는 안 된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되어가지만, 13만 명의 참전용사가 여전히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국산천 어디인가에 묻혀 있다. 2000년부터 국군 유해 발굴사업을 시작해 6600여 구를 발굴했지만 전체의 5% 수준에 머물러 있다. 더욱이 북한과 비무장지대(DMZ)에 묻혀 있는 3만∼4만 명의 전사자에게는 전혀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07년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남북 전사자 유해를 공동으로 발굴하기로 합의했지만 진전이 없다. 이 문제는 정치와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 북한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하는 미국에 자신의 땅에서 미군 유해 발굴을 허용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점이 있다.

유해발굴, 정치와 분리해 접근을


핵실험을 하고 대포동 미사일을 쏘고 북-미 사이의 극한적인 갈등 속에서도 유해 발굴은 조용히 지속되고 있다. 미국은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유해 한 구당 8만∼9만 달러를 쓰고 있으며, 지금까지 330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미군의 사례로 본다면, 북한에서의 국군 유해 발굴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고국산천에 묻혀있는 참전용사 13만 명과 국군포로 4만 명이 가족의 품에 돌아올 때까지 우리들에게 있어 6·25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윤덕민 국립외교원 교수
#시론#윤덕민#참전용사 유해발굴#국군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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