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중현]공정위의 ‘복숭아 가려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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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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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미국 중고차 시장에서 문제가 있는 중고차는 ‘레몬’이라 불린다. 겉은 멀쩡해도 속이 곯은 차를 겉보긴 예쁘지만 속은 쓰고 신 과일에 빗댄 표현이다. 반면 겉과 속이 모두 쓸 만한 중고차는 ‘복숭아(peach)’라고 한다.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조지 애컬로프 교수는 중고차 시장에 왜 복숭아는 드물고 레몬만 넘쳐나는지 설명한 이론으로 200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내용은 이렇다. 중고차 시장의 상인들은 차에 대해 속속들이 알지만 구매자는 차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다. 정보가 부족한 구매자들은 레몬에 속지 않으려는 마음에 좋은 차가 있어도 선뜻 제값을 쳐주지 않는다. 좋은 차를 보유한 주인은 제값을 못 받는다는 생각에 차를 시장에 내놓길 꺼리게 된다. 결국 중고차 시장에는 레몬만 많아진다.

이렇게 생산자 또는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의 정보 불균형은 시장을 교란하고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소비자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 신뢰성 있는 기관이 동종 상품의 품질과 가격을 비교해주는 비교정보는 특히 도움이 된다.

미국소비자연맹이 펴내는 컨슈머리포트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컨슈머리포트는 공신력을 유지하기 위해 700만 명이 넘는 회원의 구독료로만 운영한다. 자체 실험실과 전문인력을 갖추고 연간 수백억 원을 상품 시험에 쓴다. 2010년 애플 아이폰4의 수신불량이 문제가 된 ‘안테나게이트’ 때 “문제없다”며 버티던 스티브 잡스가 컨슈머리포트의 지적이 나오자 곧바로 굴복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반면 한국의 소비자들은 상품 비교정보에 항상 목말라 왔다. 일부 ‘파워 블로거’들은 소비자의 갈증을 악용해 특정상품을 추천하고 기업에서 뒷돈을 받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산하 기관인 한국소비자원 및 소비자단체와 손을 잡고 내놓은 ‘K-컨슈머리포트’의 반응이 뜨겁다. 3월 말 공개된 등산화 품질비교, 4월 초 변액연금보험 상품수익률 비교정보는 공개 직후 공정위 서버를 다운시킬 만큼 관심을 끌었다. 좋은 성적을 받은 등산화 제품은 판매량이 2∼3배로 뛰었다. 수익률이 낮게 평가된 변액연금보험상품 운영사들은 신규 가입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련 업계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생명보험회사들은 변액연금보험 수익률의 계산방식, 비교시점 등을 문제 삼고 나섰다. 하지만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나도 가입자인데 수익률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소비자들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공시체계를 바꾸겠다”며 공정위의 손을 들어주자 머쓱해진 상황이다.

컨슈머리포트가 인기를 끌면서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소비자정책으로 기억될 첫 번째 공정위 수장(首長)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미스터 컨슈머’라는 별명도 얻었다. 물가인상 억제와 동반성장 추진을 위해 기업을 지나치게 압박한다는 비판에서도 오랜만에 벗어났다. ‘김동수 공정위’는 여세를 몰아 보온병, 프랜차이즈 커피, 유모차 등 생활밀착형 제품 보고서를 계속 내놓을 계획이다.

레몬에서 복숭아를 가려내는 공정위의 시도가 박수를 받는 이유는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기 때문이다. 민간 스스로 컨슈머리포트를 만들지 못한 건 아쉽지만 뒤늦게 정부라도 나서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한 건 반길 일이다. 다만 공정위가 역량에 한계가 있는 소비자단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분석방식의 위험성은 경계해야 한다. 소비자 정보의 힘을 뒷받침하는 신뢰는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뉴스룸#박중현#공정거래위원회#컨슈머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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