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전에 이것만은…/박찬일]봄이 가기 전, 쑥 캐러 들에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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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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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요리를 배우던 시절, 스승은 기술을 익히려고 애를 쓰는 내게 한마디했다. “기술은 시간이 해결한다. 그 대신 시장을 배워라.”

요리사의 무기는 메뉴다. 메뉴는 재료에서 나온다. 재료는 시장에서 팔고, 제철은 시장을 유지시킨다. 스승은 이 간단한 사이클을 강조했다. 겨울 오징어와 봄 오징어의 차이가 전혀 다른 요리법을 요구한다. 그런 섬세한 판단은 결국 요리의 질을 높이고 손님의 만족도를 이끌어낸다. 식당은 돈을 벌고 명성을 얻는다. 참 쉬워 보이는 이 ‘공식’이 잘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서울에 오니 요리사들이 장을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에서 편하게 요리했다. 전화만 걸면 재료상이 알아서 척척 가져다 줬다. 철마다 어떤 재료가 나오는지 몰랐다. 그러니 1년 내내 메뉴가 비슷했다. 어느 날 요리사 노릇하는 게 한심해졌다. 원인은 기계처럼 매일 똑같은 요리를 만드는 것 때문이었다. 수입한 치즈를 뿌리고, 사철 똑같은 양식 넙치와 도미를 자르고, 규격화된 고깃덩어리를 구웠다. 부엌은 매너리즘에 빠졌고 내 마음에도 나쁜 콜레스테롤이 한계치까지 차올랐다. ‘이거, 때려치워?’ 오십 몇 년을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전화를 걸었다.

“야야, 먹고살라고 밥 했지 무슨 재미가 있었겠노. (엄마, 그래도 뭔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 있긴 있다. 시장에 가서 제철에 머 나오나, 입 쩍쩍 벌리는 새끼들 해멕이는 게 고마 좋았지러.”

엄마도 시장을 말하고 있었다. 제 엄마는 여러분의 엄마들처럼 요즘 말로 레시피 같은 게 없다. 여쭤 봐도 “간장 섣나 여코(조금 넣고), 푹 절였다가, 조물조물 무쳐서, 대충 버무려서….” 뭐 이런 요리 망치기 좋은 말씀만 하신다. 그래도 엄마의 식탁은 기름지고 맛있었다. 그건 제철의 묘였다. 이맘때면 뭐가 나오고, 뭐가 맛있고, 어떻게 요리하고, 엄마는 다 꿰고 있었다. 당신들의 엄마도 그러지 않으신가. 재료가 가장 맛있는 철을 골라 가장 싸고 푸짐한 밥상을 차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맛이 아니었던가. 꽁치 배에 기름이 자르르 오르는 순간을 알고 계셨다.

재료를 찾으러 종종 지역을 돈다. 그래서 알게 되는 기쁨이 한 가마니다. 봄에 주꾸미 말고 낙지도 맛있고, 봄 도다리가 실제론 별로이며, 사람들이 기피하는 4월 초의 통영 굴이 가장 실하고 진하며, 겨울에 맛보는 벌교 꼬막은 갯바람 맞으며 볼 살 튼 할머니들의 노고에 절 한 번 하고 먹어야 된다는 것까지 말이다.(벌교 출신인 내 친구는 아예 꼬막을 먹지 않는다. 눈물이 나서란다.)

요즘 미슐랭이니 파인다이닝 같은 말이 언론에 자연스레 보도된다. 유럽의 그런 고급 식당들은 특이하게도 상당수가 ‘산지’에 있다. 바닷가나 산속의 오지에 있는 경우가 흔하다. 지역에서 나는 제철 재료를 쓰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당연히 맛이 없을 리 없다. 한국의 음식 명가들도 여전히 지역의 허름한 집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러나 내가 만드는 양식은 여전히 도시 음식이다. 스파게티를 모르는 지역민들은 없는데도 번듯한 이탈리아식당은 찾아보기 힘들다. 언젠가 속초에서 재료를 찾는 여행을 했다. 배를 타는 선착장에 요리를 맛깔나게 하는 파스타 식당이 하나 있었다. 그건 나의 로망이었다. 속초에서라면 싱싱한 성게와 가자미, 대구와 섭(홍합을 이르는 사투리)으로 요리를 하는 그런 양식당을 여는 것이었다. 서해안이라면 또 어떨까. 안면도 어디쯤에서 여름이면 갑오징어를 굽고, 우럭으로 스테이크를 하는 식당을 여는 것이다. 이 봄, 쑥이 지천이다. 들에서 뜯어 씹어 보니 향이 그윽하게 휘발된다. 그걸 푹푹 뜯어서 따뜻한 물에 개어 파스타를 밀고 바지락 국물에 말아내고 싶다. 그러자면 산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재료가 나도는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갓 따낸 쑥의 향을 그대로 식탁으로 옮겨오는 일은 산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칼 몇 자루를 넣고 보따리를 꾸려 나서는 길이 내 요리 인생의 빛나는 개척임을 나는 안다.

박찬일 라꼼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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