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평인]독재자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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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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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가였다. 그는 문서 작성이라면 질색하는 타입이었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연설문이다. 이언 커쇼의 책 ‘히틀러’에는 ‘히틀러는 직접 원고를 썼는데 한번 썼다 하면 며칠을 밤늦게까지 방에 틀어박혀서 몰두했다. 3명의 비서가 히틀러가 불러주는 내용을 바로 타자기로 쳤고 히틀러는 그 내용을 다시 꼼꼼히 손질했다’고 나와 있다. 히틀러는 강력한 충격을 줄 만한 제스처를 찾기 위해 사전에 자신의 제스처를 사진으로 찍어 연구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훌륭한 연설가가 아니었다. 말주변이 없어서 연설할 때는 미리 쓴 원고를 자꾸 쳐다보면서 읽는 ‘책 읽기’ 연설을 했다. 연설의 내용도 진부했다. 박진감 넘치는 히틀러의 연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외모에도 자신이 없어 사진 찍는 쪽보다 초상을 그리는 쪽을 더 좋아했다. 사진도 대개 조작된 것이다. 그의 사진이나 초상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돼 보이는 이유다. 독재라고 해도 독일의 서방적 전통과 소련의 동방적 전통에는 차이가 크다.

▷북한 김정은은 15일 김일성 100주년 생일 기념 열병식에서 처음으로 공개 군중 연설을 했다. 김정은의 역할모델은 아버지 김정일보다 할아버지 김일성이다. 김정일이 했던 공개 연설은 1992년 인민군 열병식에서 “영웅적 조선인민국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라고 말한 것이 알려진 전부다. ‘은둔형 예술가’ 기질의 김정일은 연설을 잘하지 못할 바에야 아예 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는지 모른다. 반면에 김일성은 광복 직후 평양에서의 귀국 연설을 시작으로 해방 정국에서 수시로 연설을 했고 말년까지도 신년사를 직접 낭독했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김일성의 목소리를 닮은 중저음을 흉내 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연설 마지막에 ‘앞으로’라고 외치며 오른쪽 검지로 내리긋는 제스처도 김일성이 자주 사용한 것이다. 연설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도 긴장해서가 아니라 김일성을 흉내 낸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목소리와 제스처만 비슷했지 김일성의 카리스마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탈린식의 ‘책 읽기’ 연설에 가까웠다. 흰색 망토를 휘날리는 백마부대를 등장시킨 것은 김일성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적통의 손자가 물려받았다는 무대효과를 내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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