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조연환]천리포 언덕에 40년간 나무 심어 수목원 일궈낸 ‘벽안의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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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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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환 천리포수목원장 전 산림청장
조연환 천리포수목원장 전 산림청장
나무 심는 계절이 왔다. 이때만 되면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엘자아르 부피에. 그는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이다. 양치는 목동인 부피에는 양을 치러 나갈 때 도토리 100개를 주머니에 넣고 지팡이로 땅을 파며 도토리를 심었다. 10만 개를 심으면 2만 개가 싹이 났다. 그중 1만 개만 살아남았지만 그는 계속 도토리를 심었다. 누구 땅인지도 모르는 모래언덕에, 그것도 52세에.

10년이 지나자 참나무 숲이 조성됐다. 40년 후에는 우거진 숲 사이로 꽃이 피고 시냇물이 흐르고 새들이 지저귀는 마을이 됐다. 소설의 주인공 부피에는 37년간 나무를 심고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됐다.

사실 장 지오노는 출판사로부터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잊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실화가 아닌 소설을 썼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부피에와 같은 실존인물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런 분을 만났다. 칼 페리스 밀러(한국명 민병갈) 씨가 그분이다. 그는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천리포 모래언덕에 40년간 나무를 심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을 만들었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광복되던 해인 1945년 25세 나이에 미국 해군 중위로 우리나라에 왔다. 그는 천리포의 아름다운 자연에 반해 자주 방문했다.

하루는 한 노인이 아무도 살지 않는 자신의 산을 사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는 얼핏 보기에 모래언덕뿐인 산을 사들였다. 42세 때였다. 교통이 불편하고 농사는 물론이고 풀도 자랄 수 없는 모래땅에 그는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흙을 넣어 주고 양동이로 물을 날랐다. 하지만 세찬 바닷바람을 견디지 못해 나무는 쓰러졌다. 살아남은 나무도 모래땅에서 자라지 못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식물도감이 해지도록 나무공부를 했고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수목원을 찾아다니며 전문가들을 만나 모래땅에 살 만한 나무들을 구해 심었다. 이런 노력으로 천리포수목원에는 현재 400여 종의 목련과 370여 종의 호랑가시류를 비롯한 1만3000여 종의 식물이 살고 있다.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아시아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 받았고, 미국호랑가시학회는 ‘호랑가시수집수목원’으로 공인했다.

그는 58세 때인 19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으로 귀화해 천리포수목원에 본적을 뒀다. 평생 독신으로 산 그는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나무와 결혼했잖아”라며 평생 모은 재산과 정열을 오직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쏟았다.

2002년 4월 8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은 ‘나무가 행복한 수목원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일군 54만 m²의 토지와 1만3000여 종의 식물을 대한민국에 유산으로 남겼다. 천리포 모래땅을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일군 고 민병갈 원장, 그는 분명 이 땅을 살다 간 엘자아르 부피에다.

8일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다. 평소 그는 “내가 죽으면 묘를 쓰지 마라. 묘 쓸 땅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돌아가신 뒤 고인의 뜻을 어기고 양지 바른 곳에 묘지를 썼다. 천리포수목원은 고인의 10주기를 맞아 그를 나무 곁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수목장(樹木葬)을 하려는 것이다.

‘나는 300년 앞을 내다보고 수목원을 시작했다. 나의 미완성 사업이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져 내가 제2 조국으로 삼은 우리나라의 값진 선물로 남기를 바란다’는 그의 소망은 이제 우리 모두가 이어가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이 땅을 살다 간 엘자아르 부피에인 고 민병갈 원장님! 목련꽃처럼 환한 웃음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조연환 천리포수목원장 전 산림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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