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미국 공화당, 한국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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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5일 19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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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재선 가능성이 낮았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근 50%대에 진입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한 민주당의 지지율도 공화당을 근소하게 앞섰다. 오바마나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다. 공화당이 스스로 표를 깎아 먹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 주자들이 요즘 작정하고 쏟아내는 말들은 ‘맛이 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릭 샌토럼 후보는 “오바마가 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진학시키려 하는 것은 대학이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의식화 공장’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고교생의 약 30%가 졸업을 포기하고, 육군 복무 신청자의 4분의 1이 수학 과학 읽기 기초가 부족해 입대시험에 불합격하는 마당에 이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뉴트 깅리치 후보는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위험한 대통령인 오바마의 재선을 막는 것은 국가 안보를 위한 의무”라고 목청을 높여 쓴웃음을 자아냈다. 베트남전쟁 징집 기피 의혹으로 ‘겁쟁이 매파(chicken hawk)’ 별명이 붙은 깅리치가 백악관 상황실에서 오사마 빈 라덴 제거작전을 실시간으로 지휘했던 오바마에게 할 말은 아니다.

1500조 원대의 천문학적 재정적자와 그 갑절이 넘는 연기금 채무, 곤두박질치는 교육경쟁력, 취약점을 드러낸 산업 기반에 대처할 미래 청사진을 내놓는 인물은 없고 하나같이 당내 강경파를 의식한 정체성, 충성심 선명 경쟁에 혈안이다. 낙태, 동성결혼, 이민, 비(非)기독교를 죄악시하는 이들의 ‘꼴통’ 행태와 설득력이 떨어지는 반(反)오바마 공세에 식상해 공화당 유권자의 20% 이상이 오바마 지지로 돌아섰다.

극단적 정체성 경쟁에 열을 올리는 정치는 타협의 여지가 작다. 작은 양보도 굴복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체성은 정당의 생명이다. 대부분의 유권자는 정책과 정강을 꼼꼼하게 비교해서 정당을 선택하기보다 특정 정당에 대한 인상과 고정관념, 즉 정체성에 근거해 자신과 통하는 정당을 고른다고 한다. 이런 지지자들은 당의 목표와 비전에 맞게 자신의 세계관을 조정하고, 정당은 내실을 다지며 외연을 넓힌다. 한국의 민주통합당이 선거를 앞두고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일 텐데, 문제는 그 정체성의 실체를 종잡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유죄 판결을 받았거나 받을 게 확실시되는 후보들을 공천한 것을 보면 ‘우월한 도덕성’을 정체성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른바 ‘진보’가 요구한 지분이 터무니없긴 하지만 재협상 의지가 박약해 보여 ‘진보연대’와도 거리가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제주 해군기지, 원자력 육성정책 같은 노무현 정부의 업적을 부정하고 나선 터라 ‘친노’로 보기도 찜찜하다.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초보 정치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덕에 금배지를 달아 놓고 이제 와서 ‘한풀이’ 운운하는 건 또 뭔가. 다 빼고 나면 남는 건 ‘반이명박’ 정도인데, 오바마처럼 재선에 도전할 일도 없는 MB만 걸고넘어지는 게 정체성이라면 너무 퇴행적이지 않은가.

몇 달 전 이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신축 논란과 친인척 및 측근 비리 의혹이 잇따라 불거지자 당시 한나라당 주변엔 “이런 분위기에선 (총선에서) 100석도 못 건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민주당이 자만에 빠져 ‘헛발질’하기만 바랄 뿐”이라는 무기력증이 팽배했다. ‘참 못난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는데, 요즘 들어 새누리당 지지율이 민주당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또 명치끝이 답답해진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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