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유재동]여의도를 점령한 한국판 차베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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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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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기자
유재동 경제부 기자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28%였다. 같은 해 한국의 소비자물가가 4% 오른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살인적인 수치인지 알 수 있다. 석유를 팔아 번 돈을 ‘퍼주기 식’ 복지 정책에 쏟아 부은 것이 가격 폭등을 부추겼다.

물가를 잡아보겠다며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작년 말 가격상한제라는 초강경 정책을 들고 나왔다. 올해 대선 승리가 위태로울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일부 필수 품목은 정부가 아예 시장가격보다 30∼50% 싼 값으로 ‘적정가격’을 매겼다. 기업인들에겐 ‘물가 교란의 주범’이란 낙인을 붙였다.

하지만 현실은 남미 좌파 정치인의 선봉장 격인 차베스 대통령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물가가 안정되기는커녕 오히려 가게 진열대마다 물건을 보기 힘든 품귀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가 정한 가격엔 도저히 수지가 안 맞다 보니 기업들이 생산을 줄이거나 완성품을 창고에 쌓아놨던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선 정치가 경제를 망가뜨렸다. 개발도상국에선 정치가 경제를 잘 이끌기보다 오히려 망치는 일이 더 많다. 요즘엔 선진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의 재정위기가 길어지는 것도, 미국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이 내려간 것도 국가의 큰 살길을 외면하고 정략적 이해(利害)에만 골몰한 정치권의 탓이 크다.

정치인들은 보통 표를 얻기 위해, 가끔은 국민을 위하는 순수한 의도로 경제에 손을 댄다. 결과는 대체로 좋지 않다. 수많은 경제주체가 복잡한 회로처럼 얽혀 상호작용을 하는 한 나라의 경제를 단순한 숫자놀음인 양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 가격상한제를 도입하면 바로 물가가 내릴 것이고, ‘세금 폭탄’을 투하하면 부동산 투기가 사라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과연 현실적인 방안인지,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식이라면 누구라도 경제학자나 경제장관이 될 수 있겠지만 실패할 것이 뻔하다.

경제를 함부로 건드리는 정치인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여의도에 가는 순간 냉철했던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뜨거운 심장만 가진 ‘정의의 사도’로 표변한다. 경제전문가라면 응당 가져야 할 ‘시장에 대한 겸손’은 찾기 어렵다. 양대 선거를 앞둔 올해는 유난히 심하다.

이달 9일 부실 저축은행 피해자 지원 특별법과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국회 정무위원회 의원들이 대표적이다. 그날 회의실엔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 30년 경제 관료 출신 의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한 경력’을 지닌 사람들이 만들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법 같지도 않은 엉터리 법이 불과 30분 만에 쏟아져 나왔다.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모조리 구제하면 이 나라의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될지, 정부가 카드 수수료를 직접 정하는 게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 일인지는 관심 밖이었다.

정몽준 의원은 “경제는 수십만 개의 신호등에 의해 움직이는 교통의 흐름인데 정치인이 좀 잘해 보겠다면서 수신호를 하겠다고 하면 곳곳에서 대형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옳은 지적이다. 다만, 재산서열 상위 0.00001%쯤에 해당하는 그의 말이기에 요즘 같은 분위기엔 씨도 안 먹힐 뿐이다.

베네수엘라는 남미 최대 산유국이란 혜택을 본 나라다. 그러나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나라를 망친 끝에 지금은 인구의 30% 이상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사는 실패한 국가로 전락했다. 요즘 한국도 정치의 폐해만큼은 그런 베네수엘라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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