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두영]국민의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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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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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국민이 원한다면….” 4·19혁명으로 하야를 선언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인 유언’이다. 이 ‘일곱 음절’의 조건부 문장은 다른 대통령도 가끔 사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국민이 원한다면”(부결되는 경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전두환 대통령은 1996년 12·12 및 5·18 사건 결심공판에서 최후진술로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달게 받겠다”고 했고, 6·29민주화선언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백 번이라도 항복하겠다”고 대답했다.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전제 아래, 김대중 대통령은 ‘내각제 검토’를 시사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압박했으며, 이명박 대통령은 ‘대운하 포기’를 선언했다.

말하는 상황에 따라 어법이 다르다. ‘국민이 원한다면’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다를 때 또 그 결과 자신이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승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걸 수 있고,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넌지시 암시할 때 불특정 다수의 ‘국민’을 앞세울 수 있다. 요즘은 정치인이나 정치색이 강한 단체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는 것’으로 과감하게 치환해버리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판을 치고 있다.

도대체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지, ‘정치인이 말하는 국민이 원하는 것’은 개콘(개그콘서트)의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개그의 소재가 돼버렸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최근 설문조사한 ‘국민생활 밀착형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니즈’에 따르면 국민이 실제로 원하는 과학기술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식생활에서는 ‘믿을 수 있는 원산지 및 식품 성분 표시’(32.9%)를, 주거에서는 ‘좋은 교육 환경에 저렴한 집’(26.2%)을 가장 원한다. 교통수단은 ‘붐비지 않고 신속하며 질 높은 대중교통’(36.5%)이, 도보 이동에서는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길’(40.4%)이, 실외 활동에서는 ‘운동하고 편히 쉴 가까운 공원’(26.9%)이 필요할 뿐이다.

학교에서 가장 원하는 것은 ‘학생의 체형에 맞는 학습도구와 창의적 학교구조’(28.7%)다. ‘건강하고 영양가 높은 급식’(18.9%)이나 ‘등하교의 안전’(17.5%)에 대한 응답보다 우선순위가 훨씬 높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왜 무상 급식을 놓고 아옹다옹하고 있을까. 혹시 국민이 원하는 1순위를 희생하며 2순위나 3순위를 공약하는 것은 아닐까.

정치인들이 내거는 공약의 주제는 왜 국민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어긋날까. 국민은 생활에서 소박한 만족을 원하는데, 그들은 왜 매번 거창한 구호만 기억시키려 드는 걸까. 그들이 듣는다는 ‘국민의 말씀’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듣는 것일까.

“당신이 하느님께 말을 한다면 그것은 기도를 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이 당신에게 말을 한다면 당신은 정신분열 증세가 있는 것이다(If you talk to God, you're praying; if God talks to you, you have schizophrenia).”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사회비평가인 토머스 사스의 명언이다.

‘민심(民心)=천심(天心)’ 공식을 써서 ‘하느님’을 ‘국민’으로 바꿔보자. “당신이 국민에게 말을 한다면 그것은 연설을 하는 것이지만, 국민이 당신에게 말을 한다면 당신은 정신분열 증세가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가려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허두영 과학동아 편집인 huhh2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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