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세계 최장 ‘수요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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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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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형남 논설위원
방형남 논설위원
1992년 1월 8일 정오. 한겨울의 칼바람을 무릅쓰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회원 30여 명이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모였다. 14일로 1000차를 맞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의 출발이었다. 이효재 정대협 공동대표가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각종 사료를 통해 정신대(위안부) 만행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해명과 사과는 물론 성의 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때까지 매주 수요일 낮 12시 이곳에서 항의집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거리 시위 20년

첫 모임의 다짐대로 수요시위는 끈질기게 이어져 만 2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정대협 공동대표인 윤미향 씨는 첫 시위를 이렇게 기억한다. “서울 한복판에 여성들이 모여 일본 정부를 겨냥하는 시위를 시작했다는 의미가 각별했다. 무엇보다 위안부 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심각성을 몰라 해결하지 않았다는 너무나 순진한 생각을 했다.”

세계 최장기 집회인 수요시위는 많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으로 시작된 위안부 피해자 신고가 수요시위를 계기로 급증했다. 모두 234명의 생존자들이 어린 소녀를 전쟁터로 끌고 다니며 성 노예로 유린한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10만∼20만 명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234명은 아주 적은 숫자지만 일본의 죄상을 폭로하기에는 충분했다.

1992년에는 네덜란드계 얀 루프 오헤른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로 겪었던 치욕을 증언했다. 2007년 미국 하원과 유럽의회가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도 국내외 피해자들의 폭로 덕분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한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8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교 교섭이나 중재에 나서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와 잠깐 할머니들을 기쁘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외교통상부가 한일협정에 따라 중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가슴 아픈 일들이 이어진다. 사흘 전 위안부 할머니들은 또 한 명의 동료를 떠나보냈다. 김복동 할머니(86) 등 6명의 피해자들은 태국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노수복 할머니의 유해를 모셔놓고 추모제를 지냈다. 할머니들은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추모제와 998차 수요시위를 진행했다. 김 할머니는 “시위가 1000차에 이르도록 해결이 안 돼 착잡하다”며 “마지막 소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나서서 일본에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1000차 수요시위는 규모가 클 것 같다. 정대협은 일본군에 끌려간 어린 소녀를 형상화한 높이 1.2m의 평화비를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다. 일본에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해결 전국행동’이 지지자를 동원해 외무성을 둘러싸고 해결을 촉구할 계획이다. 뉴욕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폴란드 할머니가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2명을 만나 아픔을 나눈다.

일본, 사죄 기회 스스로 놓치고 있다

위안부 피해 신고자 가운데 올 들어 14명이 별세해 생존자는 65명으로 줄었다. 생존자의 평균 연령이 86세여서 사망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일본은 버티면 된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사죄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든다는 판단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년간 연인원 5만 명이 수요시위에 참가했다. 이들만이라도 전부 모인다면 일본 정부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다. 1000차 수요시위는 일본을 견디지 못할 만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기회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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