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성욱]예술이 과학에 주는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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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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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세계열강의 리그는 냉혹하고 견고하다. 20세기를 통틀어 찌들게 가난했던 나라에서 세계 경제 10위권 안팎으로 성장한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매년 제3세계 저개발 국가들의 관료와 과학기술자, 교육자들이 한국의 모델과 경험을 배우기 위해 우리를 방문한다.

무엇이 이런 성장을 가능케 했을까. 우리나라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은 원조와 차관을 대폭 지원했지만 미국의 전문가들조차 한국이 이렇게 빨리 공업화와 근대화를 이루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선진국의 재정적 기술적 원조를 받은 나라는 많았지만 이 모든 나라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경우 독재 정부의 강력한 산업지원 정책, 중등교육의 확산을 통한 숙련된 기술·노동인력의 양산, 유학 등을 통한 전문 과학기술 인력의 성장, 국내 연구소의 설립과 확산이 가져온 해외 두뇌의 유입, 효율적인 산업기술 인프라 구축과 법률적 제도 정비 등이 시기적으로 잘 맞아 떨어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1960, 70년대 과학기술 정책의 청사진을 보면 과학-기술-산업의 관계가 선진국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뒤집혀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기초과학을 폭넓게 지원하고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기술적 혁신을 유도하며, 이런 기술적 혁신에 기초한 산업이 발전한다. 그런데 당시 최형섭 장관 같은 전략가들은 이런 방식이 우리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는 집중 육성할 산업을 정부가 선정해 지원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핵심 기술을 연구시키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은 이런 기술 연구와 교육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에 딱 그만큼 지원했다. 선진국의 과학자들은 기초연구를 했지만 우리는 ‘응용 목적을 위한 기초연구’를 했다. 과학자들이 난감해하는 ‘목적 기초’라는 말이 이렇게 탄생했다.

시-음악-미술은 창의성의 원천

이렇게 수십 년을 노력해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발전의 결과는 바로 보이지만 폐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과학을 기술 발전이나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향, 과학기술 정책 결정 과정을 좌우하는 관료의 영향력,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가 추구할 인본적 가치와 무관하다는 인식, ‘두 문화’로 지적되는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큰 괴리 등이 우리의 과거가 잉태한 사생아들이다. 과학자들은 기초과학이 기술과는 다른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연구비를 신청할 때는 과학이 낳은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의 효과를 강조한다. 노벨상에 목맬 필요도 없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노벨상은 요원하다.

과학의 원천은 끊이지 않는 호기심이다. 교육과 연구는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얻는 과정이며 무엇보다 즐거워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개념을 가지고 노는 유희와 비슷하다고 했다. 연구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다 보니까 노벨상은 덤으로 주어지더라고 회고한 과학자가 많다. 우리나라 과학교육과 연구를 분석한 외국 전문가들은 우리의 교육체계가 자연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학생을 키워내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한다.

최근 ‘과학과 예술의 만남’ 같은 행사가 많다. 예술가들은 과학에서 예술을 위한 소재와 매체, 남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재료 그리고 과학이 열어주는 세계관 같은 것을 배운다. 과학자들은 예술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생각의 탄생’의 저자 루트번스타인은 노벨상 수상자들 같은 뛰어난 과학자 중에는 시 음악 미술 등 예술에 취미를 가지거나 예술에 부분적으로 종사한 사람이 평균보다 많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과학자들은 거의 예술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케플러는 음악에, 갈릴레이와 파스퇴르는 그림에 뛰어났고, 험프리 데이비와 첫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반트호프는 시인이었다. 독일 생물학자 헤켈의 드로잉은 당시 화가들을 자극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아인슈타인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플랑크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며, 파인먼은 봉고 연주가였다는 사실도 유명하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로알드 호프만도 시인이었고, 역시 노벨화학상을 받은 도널드 크램은 “유기화학자는 절반이 과학자, 절반이 예술가여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예술 전반과 시에 조예가 깊었다. 외국에서는 “수학자 네 명을 모으면 사중주단이 생긴다”는 얘기도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예술에 조예깊어

요즘 과학계의 화제인 과학비즈니스벨트의 모태는 과학과 예술, 인문학이 어울리는 은하도시포럼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기초과학연구원 등의 편제를 보면 이 부분은 쏙 빠져 있다. 예술은 익숙한 사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함으로써 과학의 창의성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예술은 우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잃어버렸던 과학의 본질과 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 과학과 예술은 모두 즐겁게 노는, 창의적 활동이다. 21세기에 과학의 도약을 이루려면 지난 50년간의 개발지상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좋은 방법은 과학과 예술,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과 놀이를 과학계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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