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홍]일요일이 망가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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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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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2003년 미국 워싱턴에 연수를 갔을 때 도심 속 드넓은 잔디공원인 내셔널몰을 걸으며 부러웠다. 포토맥 강변의 조깅 코스를 달리는 시민들도 부러웠다. 역시 미국이구나….

그러나 연수와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2009년 말 귀국한 뒤엔 생각이 바뀌었다. 한강변은 포토맥 강변에 비해 조금도 손색없이 잘 가꿔져 있었다. 저물녘 청계천 변을 걸어보니 내셔널몰이 부럽지 않았다.

한강공원에 매료돼 일요일 새벽마다 자전거를 탄다. 양화대교에서 성산대교 쪽으로 달리다 보면 주홍색 다리 너머로 강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것 같은 장관이다. “더 이상 미국이 부럽지 않다!”고 외치고 싶은 기분이 된다.

그러나 여명이 걷히면 불청객이 나타난다. 트럭과 승합차들이 비상등을 깜박거리며 자전거 길에 들어오는 것이다. 낮에 한강공원에서 열릴 하프마라톤 같은 행사의 집기와 진행요원을 태운 차량들이다. 산책객들은 매연을 마시며 비켜준다. 거의 매주 휴일 아침마다 보는 장면이다. 기자는 한강공원에서 시민이 함께하는 체육행사가 열리는 걸 반대하지 않는다. 도시의 낭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승합차와 트럭을 버젓이 자전거 길로 들여보내는 관리당국과 주최 측의 무례함은 이해하기 어렵다. 탁자 등을 날라야 한다면 뒤에 화물칸이 달린 전기카트를 이용하면 된다. 트럭보다는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 정도는 산책로를 양보하는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출근한다. 일요일 출근은 신문업 종사자의 숙명이다. 동아일보는 청계천의 시발점인 청계광장 옆에 있다. 가족, 연인들이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하지만 그런 평화도 깨지기 일쑤다. 지난 일요일엔 귀를 찢는 듯한 기계음악 소리가 청계광장을 흔들었다. 한 자동차회사 노조 집회에서 발산한 소음이었다. 견디기 힘든 소음이었지만 오후 내내 방치됐다. 문화제라는 명목으로 집회를 열면 집시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 제도적 맹점이 빚은 결과다.

워싱턴 내셔널몰에서도 집회와 행사는 열린다. 하지만 시설물 훼손, 폭력, 소음 등이 발생하면 엄중한 책임을 묻는다. 미 국립공원국 대외협력담당관에게 “집회의 자유와 공원 이용객의 권리가 상충할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는 “공원은 모든 시민을 위한 공공장소다. 집회신청서에 기재한 사항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차후엔 절대 집회 허가를 받을 수 없다”고 답했다.

청계천의 정취를 깨는 것은 정치성 집회만이 아니다. 특산물 판매행사 등으로 청계광장은 도떼기시장이 되기 일쑤다. 마차들까지 등장해 청계천 일대를 돈다. 마차가 신기해 즐거워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하루종일 종로의 혼잡한 차량들 틈에서 아스팔트를 달려야 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앞말의 꽁지에 머리를 처박은 말들의 겁먹은 눈을 보면서 낭만보다는 안쓰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휴식을 위한 공원과 위락시설(amusement park)을 혼동하는 이런 부조화의 풍경을 볼 때마다 왜 우리 관리들은 공원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이벤트나 유희를 만들어 들쑤시려고 안달하는지 한숨이 나온다. 인프라는 선진국 수준이 됐을지 몰라도, 타인의 불편은 안중에 없는 후안무치한 사람들, 그리고 당국의 낙후된 발상을 보면 ‘아직은 멀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선진국이 부러울 게 없다”는 자부심이 충만했던 마음이 씁쓸해지는 일요일이다.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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