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정진욱]휴대전화 ‘디지털 쓰레기’에 신음하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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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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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욱 산업부
정진욱 산업부
미국에서 공부하는 A 씨(24·여·서울 서초구 서초동)가 방학을 맞아 7월 초에 귀국해 두 달간 쓸 생각으로 새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그런데 전화가 개통되자마자 신용카드 회사와 케이블 회사의 채권추심 업체라며 연체된 금액을 빨리 내라는 문자메시지가 쏟아졌다. 내용도 무시무시했다. ‘×××, 얼마나 사나 보자’ 등 욕설이 섞인 협박성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문자니까…’하며 무시했다.

이틀 뒤부터는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한창 자고 있는 오전 2시. 술에 취한 듯한 사람이 전화를 하더니 듣기 민망한 욕을 해댔다. 그는 전화번호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에는 한 지방 경찰서에서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출두하지 않자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남성이 전화했다. “얼마 전에 전화를 새로 개통했다”고 설명했지만 듣지 않고 ×××와 어떤 관계인지 추궁했다. 이 남성은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전화를 했다. ×××의 가족들도 울먹이며 전화를 해 “내 남편은 어디에 있느냐, 제발 집으로 돌아오라고 전해 달라”며 호소했다. 기자가 직접 만난 A 씨는 “공포스럽다”고 했다.

이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전화번호의 옛 주인이 가입한 인터넷쇼핑몰에서 광고성 스팸 메시지를 보내거나 텔레마케터들이 전화를 걸어올 때도 많다. 일부는 A 씨처럼 스토킹에 가까운 정신적인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전화번호 옛 주인이 남긴 흔적이 일종의 ‘디지털 쓰레기’가 돼 돌아오는 셈이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동통신 사업자들이 옛 전화번호를 일정 기간 신규 가입자에게 줄 수 없도록 하는 게 한 방법이다. 이른바 ‘전화번호 재활용 기간 제한’이다. 이미 정부 가이드라인을 통해 28일의 제한기간을 두게 돼있다. 하지만 옛 가입자의 흔적을 지우는 데 28일은 너무 짧다. 최소한 1년 정도는 돼야 이런저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가이드라인 자체가 유명무실하다는 점이다. 기자가 통화한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새 번호가 생기는 즉시 다른 가입자가 쓸 수 있다”며 정책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인터넷쇼핑몰이나 게임업체 등 개인정보를 갖고 있는 사업자들에게 전화번호 소유자가 바뀌면 즉시 관련 정보를 폐기하라는 의무라도 지운다면 최소한 스팸 메시지는 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무 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는 “검토해 보겠다”는 원론적인 말만 했다.

정진욱 산업부 cool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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