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내 인생의 패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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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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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전문기자
고미석 전문기자
조각 같은 얼굴의 영화배우를 인터뷰하면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스타에겐 카메라 기능을 가진 휴대전화가 최악의 발명품이라는 얘기였다. 언제 어디서든 무차별로 사람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한번은 몸이 불편해 모자를 눌러쓰고 병원에 갔더니 모자 밑으로 불쑥 휴대전화가 올라와 기겁을 했다고 한다. 동료 배우 한 사람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상태라 매니저가 사진촬영을 제지했더니 대뜸 ‘팬 님’의 항의가 몰아쳤다고 한다. “저게 연예인이지 사람이에요?” 대중의 사랑 덕에 누리는 부와 인기의 이면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불편과 수모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못해

미국 TV 저널리즘에서 ‘인터뷰의 여왕’으로 꼽히는 바버라 월터스의 회고록에 공감 가는 대목이 있었다. 방송계에 입문한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그를 보면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똑같다. “패키지로 몽땅 가져볼래?” 그들 눈엔 화려한 성공만 보이겠지만 그간 걸어온 고단한 여정의 뒷받침으로 오늘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월터스가 말한 ‘인생 패키지론’의 중심에 정신 지체를 앓은 언니 재클린이 있다. 부모님은 늘 언니를 돌봐야 한다고 일렀다. 언니가 생일파티를 하지 않고 걸스카우트 활동을 못하니 그 역시 단념해야 했다. 부모님은 외톨이 언니를 위해 데이트하러 갈 때도 언니를 데려가라고 채근했다. 이런저런 제약 탓에 한때 언니를 미워했으나 뒤늦게 돌아보니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언니였음을 깨달았다. 성취에 대한 강한 욕구는 언니에 대한 책임감에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고백이다.

우리의 인생 패키지는 가정환경 재능 외모 등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조건에다 결혼과 직업 등 살면서 선택하는 길로 이뤄진다. 여행도 웨딩도 일단 패키지로 계약한 뒤엔 쉽게 바꿀 수 없듯 인생도 내 맘대로 좌지우지할 순 없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의 패키지에 남이 결코 알 수 없는 애환이 담겨있고, 자신이 불만스럽게 여겼던 환경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값진 삶을 만드는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한다. 불평과 한탄에 세월을 낭비하기보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을 제대로 가늠하고 인정하는 용기를 본받고 싶다.

‘칼을 들고 목각을 해보고서야 알았다/나무가 몸 안에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촘촘히 햇빛을 모아 짜 넣던 시간들이 한 몸을 이루며/이쪽과 저쪽 밀고 당기고 뒤틀어가며 엇갈려서/오랜 나날 비틀려야만 비로소 곱고/단단한 무늬가 만들어진다는 것/제 살을 온통 통과하며/상처가 새겨질 때에야 보여주기 시작했다’(박남준의 ‘각’)

다른 의견 가진 사람도 포용해야

넓게 보면 우리가 몸담은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나를 규정하는 패키지 중 하나가 아닐까. 무상급식을 둘러싼 투표가 보여준 것처럼 서로 취향과 이념이 판이한 사람들이 같은 하늘 아래 호흡하면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 투표를 했든 거부했든 모두 내가 받아들여야 할 패키지란 사실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람들아/우리는 다 하느님의 아들/한 핏줄이다/원수는 그대 마음을 짓밟은 증오의 망령이며/적은 그대 마음을 사로잡은 탐욕의 그림자일 뿐/우리는 한 핏줄의 형제다/아니, 저 산 속의 뭇 짐승이며 수목들/저 들판의 잡초며 하찮은 곤충들도 다/우리의 동포다’(임보의 ‘거대한 족보’)

‘동적 평형’이란 책을 보니 아이들은 7세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똑같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거기에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한국 사회의 어른들은 왜 일곱 살을 지나고도 여전히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통제하거나 적으로 돌리려는 것일까. 유리한 패키지를 가져도 교만하지 않고, 불리할 때도 비굴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개인 삶에서든 공동체에서든.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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