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진]한식 세계화에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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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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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사회부 차장, 한식·중식·양식 조리사
이기진 사회부 차장, 한식·중식·양식 조리사
몇 년 전 유럽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광역자치단체장의 해외 순방을 동행 취재한 덕에 한국대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저녁 메뉴는 호박죽과 갈비찜이 나오는 한식코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멸치볶음에는 고추 대신 올리브가 사용됐다. 두부 부침은 들기름 대신 버터로 구워졌다.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기자 눈에는 퓨전도 아닌, ‘변태적 한식’으로 비쳤다. ‘멸치는 고추장으로 볶고, 두부는 따뜻하게 데워 김치와 내놓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현지 고위 인사들을 수시로 식사에 초대해 한식의 우수성을 알릴 기회가 많은 대사의 관사에서 정체불명의 음식이 등장하는 현실은 귀국 이후에도 걱정거리로 남았다.

뜬금없이 개인 경험을 꺼낸 이유는 요즘 강하게 불고 있는 ‘한식 세계화’ 바람이 지지부진해진 데 따른 우려 때문이다. 이 말이 등장한 지는 벌써 3년이나 됐다. 2009년 5월 한식세계화추진단이 생긴 뒤 대통령 부인인 김윤옥 여사가 명예회장까지 맡으면서 각 정부 부처가 나서 한식을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분위기만 보면 세계 어디에서도 비빔밥, 불고기, 잡채를 맛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한식은 세계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이다. 각 부처가 발표한 세계화 추진계획은 어느새 사문화(死文化)돼 가는 분위기다. 심지어는 손에 쥐여준 예산도 쓰지 못했다. 추진단 출범 원년 100억 원이었던 사업비는 지난해 241억 원, 올해 311억 원으로 늘었지만 올해는 20%밖에 집행되지 않았다.

정부는 직접 외국에 대표 한식당을 세우기도 했고 스타 요리사 양성 프로그램도 추진했지만 한식 세계화로 연결되지 못했다. 심지어 양념치킨 프랜차이즈를 해외로 진출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놨다가 비웃음까지 샀다. 40년 가까이 일식집을 운영했던 사람이 한식 세계화를 하겠다며 나섰고 정부 예산을 따내려는 즉흥적 사업 계획도 남발됐다. 오죽하면 부처에서도 “다 때려치우자”는 말까지 나왔을까.

평소 친분 있는 식품 및 조리 관련 대학교수들은 “해당 부처가 청사진만 보여주고, 가능성만 제시할 뿐 철학도 없고 실천도 없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들은 중장기 대책도 중요하지만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분야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50억 원이나 들여 외국에 정부 직영의 한식당을 개업할 바엔 이미 영업 중인 한식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국내 농수산물을 해외로 공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방안도 필요하다. 해외 유명인사들이 한식을 만날 수 있는 공관에 실력 있는 조리사를 좋은 대우를 해 내보내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국 음식을 세계화하는 데 성공한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일본 중국 태국의 성공 사례를 면밀히 검토해 무얼 배울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

한식 세계화는 한식재단 홈페이지에 있는 문구처럼 ‘대표적 민간외교 아이템이자, 관련 산업을 동반 성장시키는 잠재력’이다.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에 이어 한국을 최고의 문화국가로 홍보할 수 있는 전략 아이템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해외 곳곳에 자리 잡은 일식당과 중식당을 바라보며 부러워할 수는 없다. 이미 세계 곳곳에는 한국의 고추장 맛에 반한 외국인이 많지 않은가.

이기진 사회부 차장 doyoce@donga.com 
한식·중식·양식 조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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