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북한 과두정권이 위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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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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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에는 왕이 두 명 있었다. 왕이 둘인 탓에 한쪽이 반대하면 어떤 권한도 행사하기 어려웠다. 결국 소수의 정치인이 중요 결정권을 독점하게 됐다. 매년 선출되는 에포르(행정관) 5명이 종신직 원로 28명에게 자문을 하며 통치했다. 남성 시민들로 이뤄진 민회가 있었지만 함성을 질러 찬반을 표시하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스파르타 남성은 대여섯 살 때부터 가혹한 군사훈련을 받았고 평생 중장보병 훈련에 동원됐다. 규율과 복종이 최고의 미덕이었고 이를 위해 일상적으로 연장자나 상급자로부터 매질을 당했다. 스파르타에서 가장 멸시받은 이는 비겁자였다. 적을 보고 도망가거나 항복한 ‘트레산테스’(벌벌 떠는 자)는 사회의 공적(公敵)이었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스파르타 같은 과두정(寡頭政) 국가가 독재국가나 민주국가보다 대외적으로 공세적인 행태를 보였다고 진단한다. 독재국가에선 지배자 개인이 무력도발의 비용을 지불하고 그 이익도 가져간다. 반면 민주국가에서는 국민 전체가 비용을 지불하고 그 수익도 국민에게 귀속된다. 이 때문에 승산이 없는 한 불필요한 공세를 자제한다.

하지만 과두체제에서 비용은 다수 국민에게 부담시키고 이익은 소수가 챙기기 때문에 대외도발의 유혹을 느끼기 쉽다. 더욱이 권력체제가 급격하게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두정 연합은 안팎에 적을 만들고 국민을 동원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전쟁의 원인을 국가 내부의 정치체제에서 찾는 이런 분석은 북한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선군(先軍)을 내세우는 병영국가, 전쟁국가인 북한이 걸어온 내부 권력투쟁과 대외 무력도발의 상관성 때문이다.

북한이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킬 때만 해도 그 체제는 일인독재가 아니었다. 수상 김일성이 대표하는 북한 정권은 박헌영의 남로당 세력과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 세력이 함께 권력을 공유하는 과두정 연합이었다. 김일성은 6·25전쟁의 군사적 실패를 개인의 정치적 승리로 만들어 냈다. 이후 남로당계를 필두로 소련파, 연안파를 차례로 제거했다.

북한이 김일성 독재체제를 완성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이 시기에 북한은 게릴라 침투, 푸에블로호 나포, 청와대 습격 등 온갖 도발을 감행했다. 남북 양측 사망자만 1000명에 달해 ‘제2의 6·25전쟁’ 시기로도 불렸다. 이런 강경노선을 주도한 ‘군벌주의자’를 숙청하고 유일사상체계를 완성해 세습왕조국가의 기반을 닦은 이가 바로 김정일이었다.

최근 김정은이 3대 세습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 북한의 모습은 이런 과거사와 다시 오버랩된다. 지난해 잇단 무력도발과 새해 벽두의 평화공세, 뒤이은 조준 격파사격 위협, 남북 비밀접촉 폭로에 이르기까지 종잡을 수 없는 비정상적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혼란스러운 대외행보를 권력 내부의 이상 징후와 연결짓는다. 늙고 병든 ‘장군님’과 스물아홉의 ‘청년대장’, 그 후견인 그룹과 군부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권력투쟁 속에서 충성과 배신, 숙청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이 드라마가 언제 끝날지,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위험한 내부 권력투쟁의 분출구가 대외적인 무력도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북쪽의 자욱한 안개가 걷힐 때까지 한 치의 경계도 늦춰선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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