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설리야, 숙제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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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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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문화부 차장
이진영 문화부 차장
아이돌 그룹의 프랑스 파리 공연 소식을 듣고 몇 해 전 그곳에서 만났던 16세의 덴마크 소녀 모델이 떠올랐다. 파리 컬렉션 무대에 서기 위해 분장실에서 대기 중이던 소녀는 미용사가 머리를 만지는 동안 과학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패션쇼에 참가하느라 수업을 빼먹는 대신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다”는 설명이었다. 톱모델이 돼 뉴욕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소녀의 짐 가방엔 무대에 서는 짬짬이 풀어야 할 과제물이 들어 있었다. f(x) 멤버인 여고생 설리(17)의 파리행 가방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SM 소속인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샤이니 소녀시대 f(x)의 파리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자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까지 휩쓸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케이팝의 유럽 침공’이라는 승전보를 가져다준 전사들 31명의 평균 나이는 22.5세다. 이들은 18세에 데뷔한 지 4년 반 만에 한국 대중문화사에 기록될 인물이 됐다.

케이팝이 세계 무대에서 눈부신 조명을 받는 시기에 무대 뒤 아이돌의 적나라한 실상을 들춘 공포 영화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가 개봉한 것은 아이러니다. ‘연예계 영재를 조기 발굴해 글로벌 아티스트로 키워낸다’는 기획사 시스템은 케이팝 한류의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하지만 영화 속 ‘영재’들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태엽을 감아준 만큼 움직이는 기계인형 같다. ‘핑크돌즈’라 불리는 이 인형들은 정규 교육에서 배제된 채 ‘노예’ 계약서에 묶여 한약을 먹어가며 빽빽한 일정을 소화한다. 성형 중독으로 얼굴이 망가지고, 스폰서 접대에 마음이 무너진다. 무시로 인형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기획사 대표 이름이 하필 ‘최수만’이다.

이는 물론 실화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아이돌 잔혹사는 영화 밖에서도 계속 들려왔다. “감시당하고 맞았다” “하루 1000Cal만 먹는다” “공부에 한눈팔 겨를이 없다” “고쳐야(성형해야) 뜬다”는 아이돌의 증언이 잇따랐다. 제 발이 저려서인지 “인형같이 예쁜 소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춤추고 노래한다”는 외국인들의 찬사가 “성형으로 예뻐진 소녀들이 학교도 안 가고 하루 종일 기계처럼 노래하고 춤만 춘다”는 욕으로 들린다.

그동안 한류 담론은 ‘상품’이라는 키워드에 집중돼 왔다. 대중가요는 ‘케이팝 인더스트리’, 아이돌 가수는 ‘수출 역군’으로 불린다. 아이돌을 상품으로만 보니 이들의 인권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케이팝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때 ‘소년 소녀를 상품화해 한류라는 이름으로 수출한다’ ‘산업적 측면만 부각되는 건 경계해야 한다’는 외부인의 경고음은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3∼7년 후 바뀔 외모와 목소리까지 시뮬레이션해 인재를 발굴한다”는 이수만 SM 회장의 과학적 전략이 중요하듯 “인성을 갖추지 않은 스타는 대중을 이끌 수 없다”며 소속사 가수들에게 인성교육, 성교육에 봉사활동까지 시키는 홍승성 큐브 대표의 교육적 배려도 박수받아야 한다.

지속 가능한 한류 전략을 논의하는 동시에 어린 가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근로시간을 제한하는 대책 마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여고생 설리가 다음번 출장길엔 화장품과 함께 학교 과제물도 챙겨 가길 바란다. 그래야 한류도 오래가고 ‘케이팝이 문화 선진국의 자존심에 일격을 가했다’는 자화자찬에도 낯간지럽지 않을 수 있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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