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북-중 동맹, 연극이 끝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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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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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20년 전 중국 지도부는 김일성 주석을 초청해 극진하게 대접했다. 북한 정권 수립 이래 김일성의 39번째이자 마지막 방중이었던 열흘의 일정 중 며칠 동안은 장쩌민(江澤民) 총서기가 몸소 그의 여행에 동행하기도 했다. 1991년 10월의 일이다.

장쩌민은 난징(南京)에서 김일성을 맞아 자신의 고향인 양저우(揚州)에도 함께 갔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김일성 동지께서는 중국 방문의 나날 가시는 곳마다에서 중국 령도자들과 중국 인민의 열렬한 환영과 따뜻한 환대를 받으시였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심사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소련은 한국과의 국교 수립을 북한에 일방적으로 통고한 마당이었다. 북한은 배신행위에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중국은 유일하게 기댈 혈맹이었다. 김일성은 방중 기간 “조중 친선은 공동의 목적과 리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피로써 맺어지고 온갖 시련 속에서 공고화된 불패의 친선”이라며 ‘북-중 혈맹’을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도 이미 한국과의 국교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기실 김일성 환대도 소련과 같은 ‘충격요법’을 피하기 위한 중국식 ‘동맹관리’ 외교였다. 그게 효력이 있었는지 북한은 이듬해 한중 수교를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며칠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7박 8일간 6000여 km의 방중을 마치고 귀국했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열차 안에서 잠을 자면서 강행군한 일정이었다. 김정일의 이번 방중은 20년 전 김일성의 마지막 방중과 같은 코스였다.

조선중앙통신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총비서 동지의 이번 방문길이 20년 전 김일성 주석 동지께서 다녀가신 로정과 같다. 1991년 10월 김 주석 동지의 강소성 방문 시 그이를 동행했던 일들이 눈앞에 삼삼하다.”

김정일이 아버지의 길을 따라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중국 지도자들에게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자신을 도와달라는 호소의 제스처였을 것이다. 이번 방중에서 김정일은 “조중 친선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학자들은 동맹관계의 동학(動學)을 흔히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로 설명한다. 동맹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방기의 우려, 그리고 동맹 때문에 원치 않는 갈등에 끌려들어가 자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연루의 우려다. 국력의 차이가 뚜렷한 비대칭 동맹에서 약소국은 방기를, 강대국은 연루를 걱정한다.

지금 북한과 중국은 방기와 연루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북한은 방기의 공포 속에서 중국의 지원을 얻고자 예측하기 어려운 모험주의를 카드로 꺼냈다. 대남 무력도발이 그것이다. 지난해 ‘북-중 대 한미일’의 신냉전 구도가 형성된 것은 북한이 의도한 그대로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북한을 비호만 할 수도, 내팽개칠 수도 없는 처지이다. 한편으론 북한을 다독이고, 한편으론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며 관리할 수밖에 없다.

이번 김정일의 요란한 방중은 이런 딜레마 속에서 나온 양국 합작의 연출극일 수 있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양국은 서로 걱정과 기대를 쏟아냈을 것이다. 연극이 끝나면 결산을 해야 한다. 20년 전 김일성은 중국을 다녀온 뒤 남북 및 북-미 관계 개선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갑자기 죽음을 맞으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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