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진흡]“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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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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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흡 사회부 차장
송진흡 사회부 차장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박수 칠 때 떠난 겁니다.”

몇 년 전 비(非)고시 출신인 한 경제부처 공무원이 사석에서 한 말이다. 그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던 김 수석이 테러로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경제부총리가 됐을 것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김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할 정도로 힘을 실어줘 경제부총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는 것.

그러나 당시 고시 출신 경제 관료 사이에서는 김 수석을 견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은행 출신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관계(官界)에 투신한 김 수석이 자신들이 가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는 정서가 있었다는 얘기다. 고시 합격자 연락처를 담은 수첩에 ‘고시동지회’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철옹성을 쌓고 있는 고시 출신 관료들로서는 ‘잘나가는’ 김 수석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라는 게 이 공무원의 분석이다. 그는 “김 수석이 계속 잘나갔으면 고시 출신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험한 꼴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6일 단행된 개각에서 박재완 고용노동부 장관이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됐다. 고시 출신 재정부 관료 사이에서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3월 재정부 전신인 재정경제원 장관(부총리)으로 강경식 씨가 취임한 이후 외부 인사가 수장으로 온 것이 14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 박 내정자는 행정고시 23회에 합격한 후 재정부 전신인 재무부에서 2년가량 근무했지만 성균관대 교수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정통 경제 관료로는 꼽히지 않는다. 고시 출신 재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강 부총리 이후 임창열 부총리, 이규성 장관, 강봉균 장관, 이헌재 장관, 진념 장관 및 부총리, 전윤철 부총리, 김진표 부총리, 이헌재 부총리, 한덕수 부총리, 권오규 부총리, 강만수 장관, 윤증현 장관으로 이어지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출신 계보가 무너졌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재정부의 치욕’이라는 말도 흘러나온다. 일각에서는 과거 고시 출신 재경관료들이 김 수석에게 던지려고 했던 ‘견제구’가 박 내정자에게 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재정부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던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가 합쳐진 곳. 각종 경제정책을 조율하기 때문에 ‘선임 정부부처’로 통한다. 고시 출신 재정부 관료들이 평소 “한국경제는 우리가 책임진다”며 콧대를 세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개각 이후 일부 고시 출신 재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분위기는 ‘국가경제 발전’보다는 ‘밥그릇 지키기’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번 개각에 대해 대다수 국민은 ‘고시 출신 전성시대’로 본다. 개각 대상 5개 부처 장관 중 4명(박 내정자 포함)이 고시 출신이기 때문. 청와대가 여당의 재·보선 패배 등으로 ‘쓰고 싶은’ 인사보다는 ‘탈 없는’ 인사를 선택한 결과다. 물론 재정부 관료들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자체 장관 자리를 빼앗긴 것은 물론이고 예전처럼 다른 부처 장관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권 4년차로 접어든 이명박 정부가 앞으로도 비슷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정부 관료들에게 “오버하지 말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고마 해라. (그동안)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대사와 함께.

송진흡 사회부 차장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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