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기미지마 가즈히코]前後관계도 왜곡한 日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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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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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 서울대 사범대초빙교수
기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 서울대 사범대초빙교수
올해는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 검정의 해로 3월 30일 검정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번 검정에서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이 관계한 역사와 공민 교과서도 검정에 합격했다. 주도권 다툼으로 조직이 분열되었기 때문에 거의 같은 내용의 두 종류 교과서가 출현했다.

이토 사살을 식민지화 원인으로

그런데 1910년 ‘한국 강제병합’에 관계되는 부분을 보면 이들 외에도 우려되는 교과서가 있다. 그것은 한국 식민지화 반대 투쟁에 관계되는 기술로 ‘해산을 당한 병사는 농민과 함께 일본에 저항(의병운동)하고, 초대 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민족운동가인 안중근에게 사살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일본은 1910년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조선을 식민지화했습니다. 이것을 한국병합이라고 합니다’(일본문교출판사)라는 부분이다. 이 기술의 문제점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라는 부분이다. 이 기술을 보면 의병운동이 일어나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이 된다. 저항운동이 식민지화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미 한국과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비판받은 바 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개최된 ‘한일합동역사교과서연구회’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당시 교과서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이 원인이 되어 한국 황제가 퇴위당하고,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나아가 한국 군대가 해산돼 그 군대도 합류하여 의병운동이 활발해지고, 그런 가운데 안중근의 이토 살해가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이 병합되었다’라는 흐름이 있었다. ‘항일투쟁은 한국 식민지화의 원인’이며, 안중근의 이토 살해는 ‘식민지화의 결정적 원인’이 되고 있다. 이래서는 한국의 역사를 옳게 이해할 수 없다.

연구회는 이것을 비판한 리포트를 각 교과서 회사와 집필자에게 보냈다. 그 결과 다음 검정에서는 ‘이를 계기로’와 같은 기술은 개선되었다. 그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이전에 이미 일본 정부가 ‘한국병합’을 각의(閣議)에서 결정했다는 사실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09년 7월 각의에서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결정하고 ‘병합’ 방침을 정했다. 이 각의 전에 가쓰라 다로(桂太郎)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외상은 이미 이토 히로부미의 승인을 받고 있었다. 안중근의 이토 살해는 1909년 10월이었다. 이렇게 ‘한국병합’의 방침이 이미 확정돼 있었기 때문에 이토의 사망과 ‘한국병합’의 실행은 무관하다. 따라서 안중근의 이토 살해가 병합 원인은 되지 않는다.

사실관계-조약 강제성 기술해야

이번에 검정을 신청한 교과서를 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서 한국의 청년 안중근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해 1910년 정부는 한국병합을 단행했습니다’(이쿠호샤)라는 기술이 있다. 이것과 거의 같은 기술이 ‘제국서원’의 교과서에도 있다. 단락 변화도 없이 같은 단락에서 기술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를 계기로’라고는 돼 있지 않지만, 안중근의 이토 살해가 ‘병합’의 원인이라고 해석될 소지가 있다. 또 ‘도쿄서적’ 교과서에는 각주로 쓰여 있다.

요점은 ‘한국병합’의 각의 결정과 안중근의 이토 살해 시기를 명기하는 것, 한국의 여러 항일운동을 독립해서 기술하는 것, 일본 정부의 강제적인 조약 체결을 명기하는 것, 이러한 점을 주의할 때 행수가 적은 교과서라도 비로소 정확한 역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미지마 가즈히코(君島和彦) 서울대 사범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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