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일본 대지진’ NHK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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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4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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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대지진이 일본을 덮친 11일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시시각각 커지는 피해상황을 사설에 반영한 뒤 12일 오전 1시경 귀가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회사 사택이나 사무실이 종종 흔들렸던 특파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진과 해일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일본 국민과 언론은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기 위해 일본 공영방송 NHK TV를 계속 지켜봤다.

도호쿠(東北) 지방 등을 강타한 ‘동(東)일본 대지진’의 인적, 물적 피해는 시간이 흐를수록 폭발적으로 늘었다. 일본 지진 관측 사상 최악인 리히터 규모 9.0의 1차 지진에 이어 규모 7 안팎의 여진(餘震)이 잇따랐다. 지진과 쓰나미에 이어 12일에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에서 방사성 물질 누출 사고도 났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13일 ‘전후(戰後) 65년에 걸친 가장 심각한 국가위기’라고 규정한 뒤 위기 극복을 위한 범국민적 협조를 호소했다.

1995년 한신(阪神) 대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이번에도 지구촌을 놀라게 했다. 전기 가스 항공기 열차 전화가 끊기고 식수와 식료품이 부족했지만 소란도, 약탈도 없었다. 생활필수품이나 휘발유를 사기 위해 편의점과 주유소를 찾은 사람들은 묵묵히 줄을 지어 차례를 기다렸다. 수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고, 수십만 명이 임시 대피소에서 새우잠을 잤지만 목청을 높여 불평하지 않았다.

중국 환추시보는 “도쿄에서도 수백 명이 광장에 피난했지만 남성은 여성을 도왔고 쓰레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며 “일본의 냉정함이 세계에 감명을 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일본어에는 영어에 없는 ‘가만’(がまん·我慢·참음 또는 자제라는 뜻)이란 단어가 있다. 일본의 회복력과 인내력은 앞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블로그에 썼다.

지진 화산폭발 해일 같은 자연재해가 빈발한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공동체의 협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중시한다. 저명한 작가 겸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가 “일본인들은 구미와 달리 국가를 신뢰하고 정부 지도를 잘 따르는 민족”이라고 분석했듯이 관(官)의 권위를 존중하는 풍토도 뿌리 깊다. 하지만 위기 때마다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는 경이적인 자제력과 질서의식을 지리적 특성과 역사적 전통만으로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NHK의 재난방송을 보면서 나는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단서가 느껴졌다. 미증유의 국가적 비극 앞에서 앵커나 기자, 아나운서들은 흥분은커녕 평소보다 더 어조가 차분했다.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근거로 섣불리 추측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갈등과 불안을 부채질하지 않았다. 시신(屍身)은 물론 유족 등 피해자들의 통곡이나 불평불만이 안방에 전달되는 일도 없었다. 자위대 경찰 소방대원들의 구조 활동을 현장 화면과 함께 상세히 보도했지만 ‘늑장 출동’ 운운하며 그들의 사기를 꺾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굳이 일본과 비교해 우리 언론 현실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NHK의 보도태도에 대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큰 사건이나 사고 때마다 자주 드러난 상당수 국내 언론의 무리한 취재와 의식 과잉, 전문성 부족을 생각하면 국민적, 국가적 아픔을 최소화하는 보도 행태에 대한 고민은 필요해 보인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국민이 보여준 의연한 태도와, 이를 가능케 하는 데 기여한 책임 있는 언론의 자세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국가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무형의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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