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왕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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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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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전문기자
고미석 전문기자
취향이 좀 유치해서 그런지 영화라면 뻔한 내용의 로맨틱코미디를 즐겨 보는 편인데, 이번엔 진지한 걸 한 편 보려고 점찍어 둔 게 있다. 얼마 전 열린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킹스 스피치’다. 말 더듬는 콤플렉스 때문에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기를 끔찍이 두려워했으나 마침내 이를 극복한 영국 왕의 실화를 담은 영화다.

자신의 한계 인정해야 도움 청해

심프슨 부인과의 세기의 스캔들로 왕위를 포기한 형 대신 국왕에 오른 조지 6세는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다. 예고편을 보니 그는 혼자 힘이 아니라 괴짜 언어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언어장애를 이겨낸다. 국왕의 드높은 자존심을 접고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인 행동이 용감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남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므로.

왕이든 평민이든 살다 보면 인생이 친절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살다가 보면/넘어지지 않을 곳에서/넘어질 때가 있다/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이근배의 ‘살다가 보면’)

도저히 내 힘으로 오르기 힘들 것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 앞에 섰을 때가 있다. 그땐 부끄러워 말고 도움을 청하는 법도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사람이 조직에서 성공한다는 게 우리의 신조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시라는 점을 믿어주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의 CEO 윌리엄 그린의 말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고 수용하는 것은 자기 문제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다’만 너도나도 외치다가 내 안의 고민도, 조직의 문제도 더 곪게 만드는 헛똑똑이놀음과는 대조적이다.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은 처세의 면에서도 지혜로울 수 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근대 미국인의 생활 기초 구축에 기여한 벤저민 프랭클린이 주 의회 서기로 공직에 처음 나설 때 일이다. 의회에서 그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한 의원이 있었다. 프랭클린은 그에게 잘 보이려 하는 대신 의원이 소장 중인 희귀한 책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책을 돌려줄 때 감사 메모를 보냈다. 프랭클린을 외면하던 의원은 다음번 마주쳤을 때 먼저 말을 건넸고 둘은 평생 우정을 맺었다. “당신이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보다, 당신에게 한 번이라도 친절을 베푼 사람이 다시 친절을 베풀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은 프랭클린의 ‘생활의 달인’다운 통찰이다.

벽이 가로막으면, 상황이 절망적이라면, 주저앉기보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라도 일어설 방도를 찾도록 애써야 할 이유다. 내게 간절한 꿈과 열정이 있다면, 열린 마음이 있다면 나를 도와줄 사람은 꼭 존재한다는 믿음과 함께.

마음 열면 도와줄 사람 다가와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도종환의 ‘담쟁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겸손한 용기다. 단, 내 몫을 다 하고 나서. 한 여성의 자아발견 여정을 그린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오래된 유머가 등장한다. 날마다 성인(聖人) 조각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참다못한 성인이 어느 날 나타나 외친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을 사라.”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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