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비발디 시스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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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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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 차장
유윤종 문화부 차장
“날씨가 많이 춥죠. 이런 날에 어울리는 음악 들어볼까요.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집 ‘사계’ 중 ‘겨울’입니다.”

출근길에 라디오를 들으며 2년 전 찾은 베네치아의 ‘피에타’를 떠올렸다. ‘자비’를 뜻하는 피에타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보육원 양로원 등 사회구호시설을 뜻하는 일반명사였다.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의 시대에 베네치아의 피에타는 다른 도시에 없는 독특한 시설이었다. 독신여성 음악가들이 이곳에서 음악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개방적 문화를 가진 도시였고 수많은 고아가 생겨났다. 이들 중 여아들만이 피에타에서 지내며 악기와 노래를 연마했다. 이들의 콘서트는 훌륭한 관광상품이었다. 베네치아를 찾은 외국인들은 이들의 화음이 ‘천사들의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대부분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았지만 재주 있고 그럴 의욕 있던 여인들은 바깥세상에서 오페라극장의 프리마돈나나 연주회장을 빛내는 명연주가가 되기도 했다.

이 피에타의 황금기에 여인들의 음악교육과 콘서트를 감독했던 주인공이 ‘붉은 머리 신부(神父)’ 비발디였다. 그는 당대에 왜소하고 천식을 앓았으며 섬약했던 인물로 묘사됐다. 그런 그가 유독 협주곡에 집중해 600여 곡을 썼다. 이유가 뭘까.

“피에타에서 자란 여성 중 많은 사람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비발디 관련 문헌을 연구해온 영국인 미키 화이트의 설명이다. “상처받거나 소외감을 느끼기 쉬운 여린 여인들이었죠. 이들을 위해 비발디는 수많은 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썼습니다. 바이올린부터 기타, 플루트…. 성악곡도 다양한 성부에 솔리스트를 배치했죠. 누구든지 화려한 솔로를 뽐내는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했고, 이로써 성취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비발디의 사후 이탈리아의 기악 전통은 시들었지만 음악을 통해 삶의 의욕과 자기성취를 얻는 비발디 피에타의 정신은 오늘날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작년 서울평화상 수상자인 베네수엘라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창안한 ‘엘시스테마’다. 불우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많은 청소년이 악기를 통해 자기를 발견했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됐다.

한국에서도 ‘엘시스테마 바람’은 지방자치단체, 대기업, 공연장 등 다양한 경로로 불어오고 있다. 19일 세종문화회관에는 미국 엘시스테마 디렉터 마크 처칠이 찾아와 소외계층 어린이 청소년들로 조직된 ‘세종 꿈나무 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대화를 나눈다. 27일에는 서울바로크합주단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이들 프로그램에 비발디의 곡은 없다. 그렇지만 3세기 전 음악을 통한 성취 모델의 시초가 됐던 ‘붉은 머리 신부’를 한번 기억하는 기회는 마련했으면 싶다.

작곡가로서의 비발디는 오래 잊혀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주목을 받게 됐다. 반면 그가 음악교육가로서 쌓았던 위대한 노력과 성취가 본격적으로 조명된 것은 2006년 영국 BBC 다큐멘터리 ‘비발디의 여인들’이 방영되고 나서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깨닫고 있다. 그가 자기의 ‘여인들’을 통해 이루려 했던 것의 위대성은 그의 작품들이 가진 위대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가 사람에게 기울인 따뜻함이 결국 그의 음악에 배어 나와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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