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제균]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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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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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인정하기는 편치 않지만 반세기 가까이 살아 보니 맞는 구석도 많은 말이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첫발을 디딘 사람이 에드먼드 힐러리냐, 그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냐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등산가나 셰르파가 누군지 나는 알지 못한다.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최초의 여성 산악인이 오은선이냐,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냐는 논란도 따지고 보면 ‘세상이 기억하는 1등’이 누구냐는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경쟁을 겪는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 경쟁에서 이긴 적도, 진 적도 있었다.

30년 전의 추운 겨울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한 대학의 정문 앞에 서 있었다.

합격자 수험번호가 내 번호를 건너뛴 걸 확인한 순간, 발밑의 땅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자장면을 먹었다. 자장면 먹는 나를 어머니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의 마음이란 게 그런 걸까. 며칠 전 아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봤다. 그전까진 아들의 수능 준비는 ‘아내 몫’으로 돌리고 짐짓 모른 체했다. 그런데 시험 전날 저녁부터 수능이 끝나는 다음 날 저녁까지 가슴 한쪽을 뭔가가 누르는 듯했다.

수능 때만 되면 한국의 수많은 부모가 겪는 이런 증상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자식의 성적에 좀 더 대범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 역시 속물’이라는 자괴감이 들면서도 자식 공부에 기가 살고, 죽는 게 한국 보통 부모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 비극의 뿌리는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데 있다.

프랑스는 그야말로 ‘1등’이 지배하는 사회다. 정·관·재계의 핵심요직을 상위 1%도 안 되는 그랑제콜 출신이 사실상 독차지한다. 그래도 ‘그랑제콜 폐지론’은 미미하다. 비교적 평등한 교육기회에서 이룬 성취를 존중하는 사회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경쟁에서 탈락해도 기본적인 생활은 위협받지 않는 사회안전망이 있다.

한국은 어떤가. 경쟁에서 탈락할수록 생활은커녕 생존까지 위협받는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는 본보 칼럼에서 최근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급격히 악화되는 추세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정부의 공식 통계가 작성된 이래 상위층과 하위층의 소득격차가 가장 큰 폭으로 확대되고 있다. 2010년 초 통계에는 상·하위 10%의 격차가 무려 20배에 이른다.”

한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주최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부(國富)의 총량을 키우되 경쟁에서 패배해도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수능 때만 되면 자식이 부담을 느낄까 봐 ‘시험 잘 보라’는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한국 보통 부모의 이상증세도 완화될 것이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개그가 먹히는 사회는 불행하다.

광저우 아시아경기 평영 200m에서 우승한 정다래의 눈물은 아름다웠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금메달 연기를 마친 뒤 김연아가 쏟은 눈물은 감동적이었다. 그런 승리의 눈물도 있지만, 경쟁에서 패배해 차마 소리 내 울지 못하고 가슴으로 우는 피눈물도 있다. 그런 피눈물을 닦아주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몫이다.

이번 수능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친 학생과 학부모가 많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 이르다. 대입시험은 기나긴 인생 경쟁에서 보면 첫 출발점 정도다. 아니, 그 첫 출발에 실패했던 내가 이렇게 칼럼을 쓰고 있으니 어쩌면 첫 출발점도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젊은 친구, 힘 내! 아직 시작도 안 해봤잖아….”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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