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창원]빠찡꼬에 빠진 고독한 日은퇴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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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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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점멸하는 네온 속에 최면에 걸린 듯 쇠구슬을 응시할 뿐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뿜어대는 담배연기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요란한 음악소리에도 용케 버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난 주말 우연히 들어가본 도쿄 신바시(新橋)의 빠찡꼬 풍경은 이질적이었다. 산간벽촌이라 해도 사람 사는 곳이면 어김없이 들어서 있는 ‘일본 국민의 오락시설’이라지만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빠찡꼬가 일본에 첫선을 보인 것은 1930년 나고야였다. 들불 번지듯 퍼져나가는 빠찡꼬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꼈는지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박 판정’을 내려 전면 금지했다가 전후 다시 합법화했다. 패전의 공허함을 달래려는 집단의식 때문이었을까. 빠찡꼬의 부활은 더 화려했다. 이른바 빠찡꼬 황금시대였던 1950년대는 점포 수가 39만 개, 빠찡꼬 제조업체만도 600개사에 이를 정도였다.

연간 레저백서에 따르면 일본의 빠찡꼬 이용 인구는 1720만 명에 이른다. 지난해 시장규모가 21조 엔이 넘고 취업인구도 44만 명에 이른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20%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일본국민의 놀이터’ 빠찡꼬는 숱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빠찡꼬에 중독된 주부가 어린 자녀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시간조차 아까워 아동을 자동차에 방치해 질식사하는 ‘아동학대’ 사례가 1990년대 줄을 이었다. 빠찡꼬협회가 아동학대 방지 캠페인에까지 나섰을 정도다.

최근 일본 언론에 따르면 잠잠해지는 듯 했던 빠찡꼬 의존증에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세대의 빠찡꼬 이탈이 두드러지자 빈자리를 60세 이상 고령자가 메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생산성본부가 15세 이상 남녀를 대상으로 한 빠찡꼬 이용 조사에 따르면 과거 10년간 60세 이상의 빠찡꼬 이용 인구(추계치)는 연평균 200만∼300만 명이었지만 지난해 43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전체 빠찡꼬 인구의 4명 중 1명은 60세 이상 고령자인 셈이다.

고령자의 빠찡꼬 의존증 확산에는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인을 새로운 고객층으로 확보하려는 빠찡꼬업계의 얌체 상술도 한몫했다. 일본 정부는 사행성이 높아 젊은이에게 인기가 많았던 슬롯머신을 2007년부터 금지했다. 이용 고객이 크게 줄면서 경영이 악화되자 빠찡꼬업계는 ‘시간 많고 할 일 없는’ 고령세대를 신고객으로 발굴했다. 노인들의 빈약한 경제 사정을 고려해 구슬 1개의 가격을 종전의 4분의 1로 줄인 ‘1엔 빠찡꼬’까지 등장했다.

일본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호주머니마저 노리는 빠찡꼬업계의 얄팍한 상술도 야박하지만 무연(無緣) 무위(無爲) 무전(無錢)의 서러움을 빠찡꼬에서 달래야 하는 현실은 더 서글프다. 고독함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도박은 중독성이 더 강하다고 하니 앞으로 심각한 사회문제화할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60세 이상 고령자는 고도경제성장기를 주도한 세대로 직장과 가정만 우선시하면서 자기를 돌볼 시간을 갖지 못했던 세대다. 빠찡꼬는 자기실현에 대해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던 이들 세대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찾은 나름의 궁여지책인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게 될 한국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무엇을 하며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일본의 고령자에 비해 결코 사정이 나을 바 없는 게 한국 고령세대의 현실이다. 이들이 불안하지 않게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길을 궁리해야 할 때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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